
다소 차가운 인상이다. 얼핏 예민하고 까칠해 보이기도 한다. 악역 혹은 센 캐릭터를 자주 연기했기 때문이리라. 영화 ‘암살’의 카와쿠치가 워낙 강렬하긴 했다. 그러나, 배우 박병은(40)의 실제 모습을 아는 이들은 아마도 코웃음을 칠 테다.
몇 가지 키워드로 그를 설명할 수 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재개그’ 전문가. 음주를 즐기지만 그보다는 술자리를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교감을 사랑한다. 힐링이 필요할 땐 낚싯대부터 챙기고 보는 낚시광(狂)이기도. 무엇보다 그를 행복하게 하는 건 연기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연기 말고 다른 걸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는 그는 뼛속 깊은 곳까지 배우 그 자체다.
‘암살’ 흥행 이후 4편의 영화와 2편의 드라마를 선보인 박병은은 영화 ‘원라인’에서 역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원라인’은 평범했던 대학생 민재(임시완)가 전설의 베테랑 사기꾼 장과장(진구)을 만나 신종 은행 대출 사기를 벌이는 이야기. 극 중 박병은은 야심 가득한 행동파 박실장 역을 맡아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발산했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 캐릭터들이 제각각 살아있더라고요. 박실장이라는 인물이 돈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 면도 마음에 들었어요. 또 오락영화이지만 무조건 재미있게만 흘러가지 않아요. 그 이면에는 돈 때문에 힘들어하는 소시민들의 이야기가 그려지죠. 돈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표현한 점이 흥미로웠어요.”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병은은 자신을 사로잡은 이 영화의 장점에 대해 차분히 이야기했다. 우려했던 한 가지는 박실장이 정형적인 악역으로 비춰지진 않을까하는 것이었다고. 악역 경험이 많은 그이기에 더욱 그랬을 터다. 때문에 인물의 전사(前史)를 한층 탄탄하게 채워나갔다.

“저만의 생각이었는데, 이 인물은 어릴 때부터 사채 시장에서 구르며 돈의 유무 따라 지위가 결정되는 현실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설정했어요. 돈과 권력이 없으면 평생 무시당하고 핍박받으며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살게 된다는 걸 아는 사람….” 자신이 해석한 작품과 캐릭터에 대해 설명할 때 그의 눈빛은 진지하게 빛났다.
그러다가도 이따금씩 개구쟁이 소년의 얼굴로 돌변하곤 했다. 개그 본능은 좀처럼 감춰지지 않았다. 본인에 대한 칭찬이라도 나오면 멋쩍게 웃으며 여지없이 농담으로 응수했다. 연기 인생 히스토리로 화제가 전환되자 한층 유쾌해졌다. 특히 ‘연기를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물었을 땐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갔다.
“안양예고 연극영화과에 들어가면서 연기라는 걸 처음 알게 됐죠.” “예고는 어떤 이유로 가게 되셨나요?” “중학교 담임선생님이 가라고 했어요.” “왜요?” “제 입으로 얘기하기 좀 그렇지만…, 학생들이 많이 좋아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오, 인기가 많으셨나 봐요.” “(증명할 수 있게) 저희 어머니 전화해서 바꿔드릴까요? 징글징글했다는데? 하하.”
고등학교를 다니며 연기에 푹 빠진 박병은은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2000년 드라마 ‘신귀공자’(MBC)로 데뷔한 이후엔 부지런히 활동을 이어왔다. 필모그래피에 수록된 작품 수만 드라마 15편, 영화 37편에 이른다. 주·조·단역을 가리지 않았다. 단편·저예산·독립·상업영화, 어떤 것이든 의욕적으로 참여했다.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이 그에게는 중요했다.

“웬만하면 쉬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연기하는 게 좋으니까요. 물론 촬영 전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힘들죠. 하지만 현장에 있으면 그저 재미있어요. 100억짜리 상업영화든, 친구가 200만원 갖고 하는 단편영화든 다 똑같은 마음으로 임해요. 인기스타가 되거나 말도 안 되는 돈을 벌고 싶은 욕심 같은 건 없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라는 감사함을 늘 생각하죠.”
힘든 시기가 없지 않았다. ‘암살’을 찍기 전 2년 동안 작품이 끊겼었다. 캐스팅되고 촬영을 기다리던 작품이 엎어지기도 했다. 경제적 어려움은 자연히 따라왔다. “그때 온라인 중고장터 마니아가 됐죠. 중고장터에 혜성처럼 나타난 신성이었어요(웃음). 운동화 낚싯대 자전거 향수 선글라스…, 거의 모든 걸 다 팔았죠.”
고난을 버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었다. 박병은은 “조금만 버티면 또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면서 “연기를 하기 위해선 건강한 몸 외에 달리 필요한 게 없다. 사지 멀쩡한데 못할 게 뭐 있겠나. 또한 힘든 상황에도 연기를 포기하지 않는 내 자신을 보며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본인 연기인생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작품으로는 역시 ‘암살’을 꼽았다. “이제 누군가에게 저를 소개할 때 ‘암살의 어떤 역할을 했었습니다’ 하면 알아봐주시거든요. 지인들에게도 ‘내 친구가 그 사람이다’ 말할 수 있는 꺼리를 준 것 같고요. 무엇보다, 현장에서 최동훈 감독님께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박병은은 “배우로서 나의 플랜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20여년간 연기 외길을 걸어온 그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발언. ‘어떤 의미냐’고 되물었다.
“첫 발을 뗀 거죠. 이제 진짜 살짝 연기가 뭔지 아는 것 같아요. 아직도 부족한 게 많아요. 그래서 매 작품이 수업이라 생각하죠. 현장에서 느끼는 것들이 좋은 배우가 되어가는 밑거름이 될 거라 믿어요.”
휴식시간이 생기면 그는 낚시도구를 챙겨 집을 나서곤 한다. 혼자일 때도, 지인 무리와 함께일 때도 있다. 그를 사로잡은 낚시의 매력은 대체 뭐였기에.
“나이 들수록 뭘 하고 싶거나 설레는 게 별로 없어요. 점점 무뎌지죠. 그런데 배우는 항상 그런 감정들이 살아있어야 되거든요. 낚시를 가기 전날이나 가는 동안 그렇게 즐거워요. 초등학교 때의 기분이랑 똑같아요. 어릴 때 아버지가 ‘내일 낚시 가자’ 그러면 막 신나서 뛰어다녔거든요. 그런 설렘과 기분 좋음. 그게 어렸을 때의 느낌과 가장 흡사해요.”
배우 박병은의 ‘열일’은 계속된다. 방영 중인 KBS 2TV 수목드라마 ‘추리의 여왕’을 통해 시청자를 만난다. 오는 26일 영화 ‘특별시민’ 개봉도 앞두고 있다. 차기작 ‘악질경찰’ 촬영도 진행 중이다. ‘또 바빠지겠다’는 말에 그는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빠야죠. 좋은 거죠(웃음).”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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