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야오방 25주기… 中, 인터넷 통제도 풀었다

Է:2014-04-17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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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야오방(胡耀邦) 전 공산당 총서기 서거 25주기인 15일. 중국 당국은 인터넷 통제도 풀었다.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이 지난 11일 후난(湖南)성 류양시 후야오방의 옛집을 찾아 참배했을 때 인터넷에 올려진 글과 사진을 모두 삭제했던 것과는 확연히 대비된다.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는 이날 네티즌들이 올린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글이 넘쳐났다. 네티즌들은 더욱 과감한 개혁과 부패 추방을 현 지도부에 요구했다. 이들은 ‘인민을 물고기 다루듯 함부로 짓밟지 마라’는 뜻으로 “어육인민(魚肉人民)하지 마라”고 쓰기도 했다.

‘후야오방’이라는 단어가 그동안 금기어로 돼 있었던 점에 비춰보면 당국의 이러한 조치는 주목을 끌고도 남았다. 후야오방은 관영 TV에서는 자취를 감췄고 인터넷에서는 일상적으로 검열 대상이었다.

중국사회과학원 출신 정치평론가 장리판(章立凡)은 이에 대해 “중국 정부가 후야오방에 대해 이처럼 유화적인 자세를 보인 것은 많은 국민이 그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이렇게 하는 것이 사회 안정에 이롭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후야오방이라고 하면 곧 ‘정직한 정부’를 생각할 만큼 중국 국민들은 그를 공산당의 이상적인 모습을 구현한 인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오쩌둥이 주도한 문화대혁명이 잘못된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중국 정치 지도자로 꼽힌다.

실제로 후야오방은 문화대혁명 때 “모든 건 마오 주석을 위해서”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마오 주석을 위해서”라는 구호가 유행했던 것을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관영 매체를 통해 “모든 건 마오 주석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서라고 해야 맞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당시는 마오쩌둥에 반대하는 것은 곧 ‘사형’ 또는 ‘감옥행’을 의미하는 시기였다.

그가 1987년 학생 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보수파의 공격으로 실각했지만 사실은 마오 주석을 부정한 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러한 대담함이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된 이유로 꼽힌다.

후야오방의 셋째 아들 후더화(胡德華)와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 당 간부 자녀들은 이날 장시(江西)성 궁칭청(共靑城)시 푸화산(富華山) 동쪽에 위치한 후야오방 능원을 찾아 헌화하고 참배했다. 일반인 중에는 후야오방의 대형 사진을 들고 무리를 지어 참배하기도 했다.

공청단과 관계된 ‘궁칭청’이라는 지명은 후야오방이 총서기 시절인 1984년 12월 이곳을 찾아 이름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후 이곳에 안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중국후야오방연구회’는 유명 법학자 궈다오후이(郭道暉), 두광(杜光) 전 중앙당교 이론연구실 부주임 등 개혁적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이날 후야오방 기념 좌담회를 열었다. 그러나 천안문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전 총서기의 비서였던 바오퉁은 당국의 가택연금 조치 때문에 좌담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베이징=정원교 특파원 wkcho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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