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오종석] 미안하다, 용서해줘 친구

군사정권의 끝물인 1990년대 초. 언론사 입사를 위해 공부하던 친구한테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꼭 술 한잔 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선술집에서 만났다. 친구는 연신 술잔만 비웠다. “왜? 무슨 일 있어?” 친구는 한참동안 입을 열지 않다가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 용서해줘 친구. 용서해줄 거지?” 친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계속 술잔만 비웠다. “대체 무슨 일이야?” 채근하자 친구는 속내를 털어놨다. 언론사 입사를 포기하고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지금의 국가정보원)에 들어가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밤새 술만 마셨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국정원

당시 안기부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학생들도 끌려가면 반죽음이 돼서 돌아온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살벌하고, 음습하고,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절대권력을 가진 곳으로 인식됐다. 선배들에 따르면 그 이전의 중앙정보부(1961∼1981)는 더 살벌하고 무서웠다고 한다. 김대중정부가 들어선 후 안기부는 국정원으로 개명했다.

세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던 ‘안기부 요원’들은 언제부턴가 ‘국정원 직원’으로 보통 사람들에게 편하게 다가섰다. 대한민국 최고 정보기관 소속으로 국가를 위해 일하는 자부심과 보람을 떳떳하게 얘기할 정도까지 됐다. 인기 드라마 ‘아이리스’, ‘7급 공무원’ 등으로 국정원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매년 치러지는 국정원 7급 요원 공채는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다.

그런 국정원이 다시 나락으로 추락했다. 지난해 대선 직전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단초가 드러났다. 경찰이 “별것 아니다”고 발표했을 때만 해도 정말 별것 아니란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말이 조금씩 드러나니 엄청난 사건이었다. 국가기관인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했다니. 군사정권도 아닌 민주정권에서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야당의 한 중진 의원은 “대선 전에 국정원 개입 사실이 명백히 밝혀지기만 했어도 우리가 이겼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야권에서 대선불복성 발언이 나오는 배경이다. 온 나라가 이후 1년여 동안 이 사건으로 시끄러웠다. 국정원의 ‘장난’으로 정치가 마비되고, 경제도 발목이 잡혔다. 국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 철저한 검찰 수사와 법원의 최종 판결이 있어야 분명한 사건 전모가 드러나겠지만 현재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국정원은 국민에, 역사에 큰 죄를 지었다.

정치개입 막는 개혁안 필요

지금 국회에서 국정원개혁특위가 진행되고 있다. 국정원이 제출한 자체 개혁안은 국민의 눈높이에 턱없이 모자란다. 물론 전체 국정원 직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순 없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열심히 현장을 뛰는 수많은 직원이 있다. 이들이 있기에 ‘장성택 사태’ 등 북한의 상황을 빠르고 정확히 인식해 대처할 수 있다. 고도의 기업 정보가 해외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물망을 치는 등 경제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문제는 외부에서 낙하산으로 간 정치인, 내부에서 정권만 쳐다보고 정치를 하려는 일부 간부들이다. 그래서 시스템이 고쳐지고, 제대로 제도적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북한 상황을 빌미로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먼저 국정원 자체의 뼈를 깎는 각성과 제도개선 노력이 필요하다. 국회에서도 이번 기회에 다시는 정치개입을 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개혁안을 만들어야 한다.

안기부 당시 국정원 원훈은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지금은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이다. 자유와 진리가 아닌 권력과 정권을 위해 헌신한다면 국정원은 음지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 청소년들이 국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상황이 다시 오지 않길 기대한다.

오종석 정치부장 js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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