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하윤해] 30년 전의 일기

감출 것은 아니지만 굳이 꺼내고 싶지 않은 과거가 누구나 한둘씩은 있게 마련이다. 그가 그런 기억과 마주치게 된 것은 몇 주 전이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초등학교 4학년 딸의 표정이 보통 때와는 달랐다. 1학년 남동생을 부르더니 “아빠는 우리한테 선생님 말씀 잘 들으라고 하면서, 초등학교 다닐 때 만화책 보다가 선생님한테 혼난 적 있지”라며 준비된 비수를 꽂았다. 아들 녀석은 “정말?”이라며 놀란 듯 되물었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묘한 데가 있다. 딸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확히 30년 전 교실의 모든 것들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60명이 넘는 학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았던 콩나물 시루 같은 교실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 내막을 직감했다. 어머니는 그의 모든 일기장 공책을 매 학년이 끝날 때마다 바느질로 묶어 한 권으로 만드셨다. 처는 “오늘 시댁에 갔는데, 어머니가 주셔서 당신 초등학교 때 일기를 갖고 왔다”고 말했다.

그 날을 찾아냈다. 1983년 9월 29일. 제목 ‘꾸중’. ‘선생님께 심한 꾸중을 들었다. 공부 시간에 만화책을 봤기 때문이다. 만화책도 찢기고 혼도 났다. 선생님께 편지에도, 일기장에도 좋은 수업 태도를 보인다고 했는데 말이다. 오늘의 잘못을 깨우치고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느꼈다.’

5학년 때 공부하는 척 교과서를 세모로 펼쳐 책상에 세워 놓은 뒤 만화책을 무릎에 올려놓고 정신없이 읽고 있는데, 무언가 강한 힘이 갑자기 만화책을 낚아챘다. 무서웠던 담임선생님의 억센 손이었다. “수업시간에 이런 거 보면 안 돼”라는 고함소리와 함께 그 두꺼웠던 ‘보물섬’은 반으로 찢어졌다. 어머니는 만화책을 사주지 않으셨고, 그는 당시 최고 인기였던 월간 보물섬을 친구들로부터 빌려 봤다. 빨리 다 보고 돌려주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 결국 사단이 난 것이다.

그의 성장기를 괴롭혔던 것은 그 사건보다 이후 벌어진 일들이다. 일기를 쓴 며칠 뒤부터 어머니가 걱정스레 그를 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용돈을 거의 주지 않았던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1500원이라는 거금을 쥐어 주셨다. 독촉에 시달렸던 그는 친구에게 새 보물섬을 사줬다. 장난꾸러기였으나 솔직했던 아이는 일기 쓰는 게 두려워졌다. 선생님이라는 공인된 독자와 어머니라는 암묵적인 독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기에는 어린 아이가 사라졌다. 자유롭게 쓰던 일기가 고역으로 다가왔다.

글쓰기에 있어 자기 검열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그는 이미 30년 전에 어슴푸레 짐작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지 말아야겠다는 순수한 생각은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변해갔다. 그는 가끔 자신의 상상력이 1983년 9월 29일을 기점으로 틀에 갇히기 시작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매일 검사하는 일기를 안 쓸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아이는 머리를 싸맸다. 좋았거나 잘했던 일들로 일기장을 채웠다.

자기 이야기를 잃은 아이는 교실 밖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그 해 10월 8일 토요일에는 비가 왔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가 오늘 서남아와 브루나이를 영부인과 함께 방문하신다…나는 기념우표를 샀다. 아무런 일 없이 안녕히 다녀오세요’라고 일기를 맺었다. 9일은 버마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폭발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일기장은 북한에 대한 강한 분노로 가득 찼다. 한국과 다른 나라의 스포츠 경기는 하루를 때울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화제를 구하기 위해 일찌감치 사회적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기대하지 못했던 긍정적 효과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솔직한 글쓰기는 아직도 그를 괴롭힌다. 눈물 없는 비극이 진정한 작품이라며 과장 없는 기사를 후배들에게 요구하면서도 그의 글에서는 감정처리가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여전히 눈에 띈다. 알고 있는 것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할 때도 잦다. 평생을 따라 다닐 숙제 같다.

30년 전의 일기를 덮으며 그는 다짐 하나를 한다. 30년 전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딸의 일기를 몰래 훔쳐보며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자기를 놀렸다는 일기를 읽고 왕따 문제를 떠올리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고, 회장 선거에 떨어졌을 때 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을 읽고는 가슴이 짠해 선물을 사주기도 했다. 일기를 안 읽은 척 하면서 딸의 속내를 듣기 위해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딸도 어린 그처럼 아빠가 몰래 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빠의 근심어린 시선이 아이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상처를 주지 않았는지 자문한다. 가장 솔직한 글쓰기는 내면의 울림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이다. 그는 조만간 딸에게 “그동안 일기를 몰래 읽었었는데 사과할게. 앞으로는 절대 안 읽을 테니 아빠가 방에 들어갈 때 일기장을 후다닥 덮지 않아도 돼”라는 말을 전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1인칭 ‘나’로 쓰는 게 여전히 불편한 사람이다.

하윤해 산업부 차장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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