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김종걸] 트렌티노로부터의 상상
선진국 경제가 직면한 문제는 거의 유사하다. 바로 심화되는 고령화와 양극화이다. 성장은 둔화되고 복지수요는 늘어가나 정부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 여기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작지만 똑똑한 정부를 만들며 새로운 성장동력을 마련하는 것이다. 관건은 사회전체의 경제적 참여도를 어떻게 늘려갈 것인가에 있다. 일부 첨단산업만이 아니라 그동안 성장에서 소외됐던 지역 및 사람들을 재조직하는 것, 즉 새로운 내발적(內發的) 성장이 강조된다.
이러한 정책목표에 상당히 근접한 지역은 세상에 많다. 이탈리아의 트렌티노(Trentino)도 협동조합을 통해 목표를 달성한 대표적인 사례다. 트렌티노는 알프스산맥 바로 밑으로 그 옛날 빙하가 만들어놓은 긴 골짜기를 따라 이루어진 지역이다. 1인당 소득은 이탈리아 및 유럽연합(EU) 15개국 평균보다 20%나 높고 실업률은 반 이하로 낮다. 유럽 내 각종 사회조사에서 생활만족도가 가장 높은 곳 중 하나로 간주된다. 이탈리아 내 기업하기 가장 좋은 지역 2위로 거론될 만큼 지역경쟁력도 강하다. 2차 대전 이후 문맹률이 높고 가난했던 곳이 유럽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마을로 변모한 것이다.
산업의 중심은 4만9000개에 달하는 중소경영체로, 농업·농가공을 비롯하여 전자 및 기계산업 비중도 상당히 높다. 그 중심에는 협동조합이 있다. 인구 53만의 트렌티노에서 협동조합 조합원은 22만7000명이다. 농업협동조합은 지역 내 전체 농산물 생산 및 유통의 90%를, 신용협동조합은 총 여수신액의 60%를, 소비자협동조합은 전체 유통망의 37%를 점유한다. 300여개에 달하는 근로자협동조합, 사회적협동조합, 주택조합 등은 다양한 사업기회를 확장시키며 경제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협동조합의 시장점유율이 높다는 것만이 아니다. 트렌티노는 6206㎢에 달하는 넓은 지역이다. 가파른 산악지역에 217개의 마을이 있으며, 이 마을 방방곡곡에 협동조합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가령 193개 마을에는 소비자협동조합 매장 이외에 다른 매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용협동조합 또한 381개의 지점이 사방에 퍼져 있다. 트렌티노 마을들 가운데 60%는 다른 은행 지점이 전혀 없고 오로지 신용협동조합만 있는 곳이다. 일반 사기업이 진입하지 못하는 곳에, 협동조합 내에서 서로 상부상조하는 기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산촌마을의 일상생활은 상당히 불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흔히 그렇듯 잘 되는 곳은 어디나 비슷한 원칙이 작동된다. 첫째는 협동조합이 그 사회에 중요한 발전전략이라는 것을 지방정부와 지역주민이 함께 공유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가치와 비전을 행정과 주민이 공유한다는 점은 이곳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두번째 이 지역의 특징은 정부지원의 정도에 있지 않고, 협동조합 상호간에 긴밀히 협력하는 점에 있다. 트렌티노 협동조합연합체는 536개의 산하조직이 있으며 개별조직은 이익잉여금 중 30%를 연합체에 납부한다. 이 자금은 다시 지역 전체의 협동조합 발전을 위해 사용된다. 신용협동조합의 경우도 전체 예금액의 97%가 지역사회에 다시 재투자(대출)된다. 지역의 인원과 자금과 지식이 지역 내에서 환류되며 발전해 가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원주, 완주, 홍성 등에서 협동조합 간 협동의 새로운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그 실력은 상당히 미흡하다. 지역의 일자리와 사회서비스를 이끌어가기에는 개개의 체력이 너무나 열악하다. 트렌티노를 상상하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가 남아있다.
그러나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있다. 행정과 주민이 비전을 함께 공유하는 것, 지역 속에 있는 자원들을 효과적으로 지역 내에 환류시키는 것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통점은 중앙정부 예산을 따내기 위해 목을 매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김종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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