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 약국(93)

Է:2011-03-22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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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이 깊어야 뫼가 높다

현대의 산업주의가 붕괴하면서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 모던’과 같은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는 이론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지요. 아시는 것처럼, 이런 이론을 주장한 학자들은 가타리(F. Guatari)와 들뢰즈(G. Deleuze) 같은 이들입니다. 이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을 ‘계량 가능한 공간’과 ‘계량 불능의 공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지요. 쉽게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산업문명이란 이 계량 가능한 공간을 정복하고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오는 세기는 바로 계량 불가능의 공간영역에서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지적도에 등록하여 소유할 수 없는 그런 공간 속에서 인간 삶이 이루어지는 세기다’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분할하고 계측할 수 없는 그런 매끄러운 균질 속의 세계란 어떤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시원의 공간으로 이해하는 ‘하늘’이 바로 ‘그곳’이고 ‘그것’입니다.

예정대로라면, 카트만두에서 우리 일행은 4~5시간 혹은 7~8시간을 달려 해발 2000m 언저리인 깔리까스탄이나 둔체까지 이동해야만 다음 날의 발걸음이 짧고 가벼울 터였습니다. 그러나 카트만두의 텃세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겨우 카탈리라는 길가 숙소에 서 히말라야의 첫날밤을 맞아야 했죠. 그날은 마침 동네 청년의 결혼식이 있어서 밤새 버들피리 소리 같은 興樂이 캄캄한 밤하늘을 휘돌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출발한 버스는 산행 출발지인 깔리까스탄을 향해 낭떠러지에 매달렸습니다. 차마 ‘달린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풀쐐기 애벌레가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겨울바람을 이겨내듯 그렇게 대지의 난간을 버스가 내달았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천길 낭떠러지’라고들 하지만 버스는 ‘만길 구름 위’를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행여 자동차가 스르륵 저 밑으로 굴러 떨어지면 차라리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게 훨씬 행복하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까마득한 저 밑바닥까지 당도하려면 몇십 분은 족히 걸릴 테니 말입니다. 그 긴 시간을 고요하게 누리는 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복이겠다 싶었습니다.

우리 교회 남선교회원들이 매주 토요일에 등산을 합니다. 교회 주변의 가까운 산들을 오르죠. 산 길 곳곳마다 등산로가 잘 마련되어 있습니다. 안내판도 있고, 때론 운동기구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정표에는 어디까지 0.9km 또는 정상까지 2km와 같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나라 대부분의 이정표는 ‘길이’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서울까지 98km, 부산까지 500km와 같은 것입니다. 이 ‘길이’로서의 삶은 다시 ‘넓이’와 ‘부피’로 확장됩니다. 미터-평방미터-입방미터 이렇게 말입니다. 결국 이 ‘길이’, ‘넓이’, ‘부피’가 우리의 삶을 현재화시킵니다. 그것이 산업사회의 표본인 ‘계량 가능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근대 경제학 개념 중 하나인 ‘지대론(地代論)’ 즉 ‘땅’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히말라야에 가니, 깔리까스탄으로 가는 그 낭떠러지에 달라붙고 보니 히말라야의 이정표는 ‘길이’가 아닌 ‘높이’였습니다.

우리나라 백두산 높이의 두 배나 되는 산을 닷새 동안 오르는 동안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앞으로 몇 미터’와 같은 이정표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어디까지 몇 미터, 어디까지 몇 킬로미터 하는 길이의 단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생은 ‘길이’가 아니라 높이였습니다. 어느 동네까지 몇 킬로가 아니라 여기는 해발 몇 미터, 여기는 해발 몇 미터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엔 이미 ‘길이’나 ‘넓이’나 ‘부피’같은 ‘계량 가능한 삶’이 아니라 하늘을 상징하는 ‘높이’의 ‘계량 불가능’한 세계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후기 구조주의’와 ‘포스트 모던’이 생성된 세계였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히말라야로 가는 길이 만길 낭떠러지인 것을 알았습니다. ‘길이’에서 ‘높이’로 나아가고자 할 때 맛보아야 하는 의식의 통과의례라는 것을 말입니다. 낭떠러지에 매달리지 않으면 ‘길이’로 살았던 부정을 씻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정을 씻지 않고서는 ‘높이’를 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사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무시무시한 나한들이 칼과 쇠스랑을 들고 눈을 부라리며 출입자의 정수리부터 발끝을 훑어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골이 깊어야 뫼가 높은 법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허태수 목사(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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