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강원 평창 지동리 김웅녀 할머니
“자식 넷 보내고 50년 한숨… 교회서 평안 찾았지”
김웅녀(79) 할머니는 강원도 평창 산골에 태어나 지금도 고향에서 살고 있다. 맑은 공기 맑은 물, 무엇보다 하나님 알게 된 덕에 남편 김진극(85) 할아버지와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는 할머니. 전쟁 통에 잃어버린 첫 딸을 시작으로 9남매 중 넷을 땅에 묻어야 했던 할머니는 50여년을 가슴을 치며 살았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교회에 나가면서 평안을 찾았고, 믿기 힘든 체험도 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구멍가게 하나 없는 산골. 평창군 평창읍 지동리의 김 할머니 댁에서 파란만장한 할머니의 인생 스토리를 들었다.
보릿고개 시절
아이고 옛날에는 먹을 것도 없었어요. 나물 뜯어먹고 살고 그렇게 살았죠.
옥수수만 아주 산전<산 앞>에 가서 심어 가주 먹고 살고. 그러고 옥수수도 비류<비료>가 없으니 뭐 돼요. 통이 요매큼<요만>한 게 알도 드문드문 하나씩 배기고<박히고> 이런 거. 그거 가지고 먹다 보면 개우또<조금밖에> 못 먹어 수수또수수도 심어도 그것도 못 먹고 그래가지고는. 봄에 가면 나물만 나믄 그 나물이 양식이죠. 나물 뜯어 말려서 묵 나물해서 묶어서 동치미 해 놔. 그걸 한 솥씩 쌂아가지고 빠다<빻아다> 욺고<옮겨> 가지고 옥수수 있으면 한 보꾸(주발의 뚜껑·함남지방 사투리) 넣고. 식구가 십여 명 식구여. 시아버지 형님, 아버님 어머님 다 계시고 시누가 둘이고 시동상 있고. 그러니까 나까지 허니 아홉식군가 그랬어. 나물 옥수수 한 보깨<주발의 뚜껑> 너니 뭐 보이지도 않지 뭐. 그걸 식사라고 하맨 살았지 뭐. 쌀 구경도 못했어요. 그게 보릿고개지 참.
첫 애 낳던 해가 동란 나던 육이오. 내가 열일곱에 개론하고 이듬해 열여덟이잖아요. 난리가 나서 인민군이 들이 밀어다 교전을 하는데 이 양반은 청방이라는데 갔어. 대구 가 있었어요. 요 또 다 피란을 가라는데 우린 도니<돈이> 없으니 식구가 많으니 갈 수가 없잖아. 뭐 차가 있어. 이 양반 혼차<혼자> 나가고. 그 때 내가 그러니깐두루<그러니까> 열아홉 되면서는 음력으로 정월달인데 내가 애기를 낳았어. 집두 없는데. 집두 다 탔지 뭐. 저리 오다보면 저짝 우리 동상들 집인데 그 터에 내가 거가서 첫 애기를 하나 낳았는데 딸 애기를.
그랜 다음에 우리가 그만 일루 집이 난리에 다 타고 방통망<방공호> 있는데 정월 십삼일 날 낳는데 십 육일날. 정월 대보름이 엊그제 같은데 오늘 같이 그렇게 비가 쏟아지더라고. 비가 새서 있을 수가 있나요. 우리 맏동서 되는 분이 아는 집에다가 나를 데려다가 놨어 애기하고. 거겔 가니까 이 마을에 피란 못 갔는 중패<60∼70세 노인>이 양반들이 쫙 몰린거요.
애기엄마라고 아랫목에 가라고 하는데 부엌에 불을 때야 방이 뜨시지. 그러니 물이 부엌으로 하나<한 가득> 들어온 거래요. 고만 불을 못 때니 아주 냉방이지 뭐. 저기 애를 곰방<금방> 놓은 사람이 냉방에서. 집에서 아침 먹을래가 하니 아침 굶고 점심 굶고 저닉 굶고 기튿날<그 이튿날> 아침 굶고. 뭘 해야 먹지 어떻게 할 수가 있는가요.
폭격 피하려 광목 뒤집어 쓰고 피난
우리 성님이 “아이고 암만해도 에미 잡겠다고 아무던지 사돈댁한테 말해가지고 사돈댁에 가야지.” 친정 오마이 오셨더라고. 가자 해서 나오니 인민군들이 나갔다 쬐께 내려오느라고 가가 뭐 때가찌<떼거리 같다.> “오마니 사람 살려달라.” 문을 거르고 있으니 밖에 와서 문을 두드리고. 우리 성님이 여기 몸 푼 사람 있으니 가라고. 또 소릴 지르고. 그래 가지고 쬧겨서 나오니 온 갱변에 인민군이여. 피란안간 집에 가서 옷이 하얀 광목 있잖아요. 그걸 가꾸 마냥 쓴 거여. 뒤잡<뒤집어> 쓰고 길에 보글보글<바글바글> 하더라고. 우리 시어머니는 애기를 끌어안고 오고 우리 친정 오마이는 이불 보따리를 들고, 나는 광목치마 뒤잡 쓰고. 비앙기 오면 시커머면 폭격을 하니까. 기런데 다섯 때를 굶으니 애기 놓은 사람이 걸음이 나요. 엎어져서 나오니까 인민군이 난리지. 엎드리라고 날 걸어간다고. “저 아주마이가 죽을라고 환장했다카이”하면서. 비앙기가 돌아다니니까.
지금 생각하니 몇 시간을 갔죠. 친정을 가니깐 두루 인민군이 우리 오마니 집이 방이 네 칸인데 집이 꽉 찬 거여. 인민군이 쬧겨 들어와가지고. 우리 오마니를 밥 해달라고 서로 끌고 가. 우리 오마니 나 챙길 새가 없는 거여. 그 밥해주는 거 다 보살펴 해주고는 내중에 늦게야. 지금 생각하면 10시도 넘었어요. 그랬는데 오마이가 저 맵쌀을 빻아 갈거래<가을> 만두 해먹고 만들었잖아요. 그게 옥쌀이라 그래. 그걸 데워가지고 옛날 놋 대접에다 한 대접 해가지고. 우리 오마니는 날 굶은 것도 모르지. 그걸 마시려고 하니 내가 입이 씨궈써 못 먹겠더라고. 너무 여러 때 굶으니까 입이 소태<소태나무의 껍질> 걸쳐 씨구니 못 먹겠다고 하니까. 아이고 그래도 먹어야 살지 안 먹으면 죽는다고. 저렇게 아주 포꾸마치포크 꼬부려지. 한참 앉아 시간을 들여 한 숟갈씩 한 숟갈씩 이리 떠먹어. 그걸 먹으니까 정신이 좀 나더라고. 인민군들이 그렇게 복작<북적>거리더니 그 이튿날 모다 쬧겨서 가더라고.
친정에 가서 난리를 겪고 난두루 동생들이 호역 낫고 나니 그제서야 내가 호역이 걸린거야.
먹지도 못하는데 호역이 걸린거야. 그 애기 쪼그만 것도 걸리더라고. 그래도 삼월달까진 살았으니까. 한 두어 달 건저 살았지. 나도 아주 다 죽게 됐지요. 밥을 못 먹어 가지고. 그 난리에 뭐 약이 있어요. 남으 발에 감고 다닌 토끼털을 구해가지고, 복상낭게<복사나무> 쭉정 몇 개, 참밀 한 대접 얻어다가 비앙기 쇠꿉쇠굽이라고 있어요. 냄비가 있어야지. 물을 넣고 끼리는 거여. 한 냄비를 하루 죙일 다 먹고 나니까 숨이 나오더라고요. 숨이 맥혀 가지고 오를 숨뿐인데. 그제서야 살겠더라고.
54세에 교회 등록
25년전 그해 2월 달부터. 첨이 골객<골짜기>에 은성교회라고. 예감(예수교대한감리회)이라 하더라고. 걸어 대녔지. 길도 이렇지 않고. 그때 우때 교횔 나갔냐면 우리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더라고. 그때 그래도 우리가 소를 맷 마리 사방에 남을 주고 키우노고 그러는데 그렇게 소가 잘못되더라고. 사방 그래. 새끼낳다도 잘못됐다 하고. 우리 시어머니가 자꾸 꿈에 보이는 거여. 돌아가셨는데.
그랬는데 매탄이라는 데 거기 뭐이가 하더라. 쪼그만 암자가 있었는데 그걸 없애고 당군 할아버이를 모신다 하더라고. 배서문이란 사람이 이 골대 사람들이 쌀을 한 말씩 해가지고 재를 넘어서 글루 싹 찾아가는 거여. 자꾸 오라 그러는데 갈 마음이 없더라고 가면 교횔 가지 그런덴 갈 마음이 없더라고.
우리 친척으로 되는 고모 할머니 되는 이가 조 아래 조동이란 데 계시는데 우리 집에 오셨더라고. 오셔가지고 전돌 하시더라고. “자네 정선서 같이 살았는데. 자네 살아온 걸 아는데 하나님 알아야 하네.” 그 노인네 하룻밤 주무시는 노인도 아닌데 우리 집에 와서는 하룻밤 주무시고 가는데. (남편이) 근데 날더러 그러는 거야. 자기도 가고 싶으면 가라고. 참말로 가래. 그래서 내가 교횔 나갔지요. 속으론 가고 수워도<싶어도> 못 가고 있다가 교횔 나갔는데. 그래 나가매.
하나님 믿고 나가고 하니까 맘이 편해지더라고요. 안 좋은 일도 보고 밥 먹을라 하면 한숨이 나왔어. 한숨 안 쉬면 속이 답답해 못 배기고 그랬는데. 저 양반이 만날 한숨 쉬니까니 듣기 싫다 하더라고. 교회 다님서 일년 대니니까 괜찮아지더라고. 소도 괜찮아 지더라고요. 애들도 잘 크고. 그러니까 그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운전기사 목사님
은성교회라는 데서 한 9년을 댕겼는데. 그만 부흥이 안 되더라고요. 성도들이 괜히 목사님을 비뜨고 끌궈가지고<비난하고> 모함해 강제로 쫓고 이래니까는 교회가 안돼. 목사님이 안 계시니 이 동네서도 마이 내려가다가 고마 마카 못 가고. 그래서 1년을 그양 집에 있었어요. 1년을 집에 있간두루 이웃에 있는 노인들이 크리스마스가 되니까 나를 쫓아 온거여. 날보고 교횔 가야지 일년을 그냥 있음 어떡하느냐고. 그날이 주일인데 그럼 가보자고 가서 저기 뭐여 안 받아주면 할 수 없고. 가보자고 그래 내려갔어요. 그래서 평창엘 갔어요 노산교회에. 예배시간에 가니. 우리도 거가 같이 예배를 드리고 점심 식사를 하고는 목사님이 그 세 노인들을 다 오라고 하지 않고 날만 올라 해. 전에 가신 전 목사님이라고 계섰는데, 그 때 내가 집산데 들어오라 하더라고. 들어가니깐두루 교회 안 나가시던 분들이 들어오면 아주 환영하고 받아주겠데. 그런데 교회 댕기시던 분들이 이렇게 오시니 무슨 이유가 있겠지 왜 내 교회를 놔두고 남으 교회를 올 턱이 있겠녜. 맞지요. 그런 사람은 받을 수가 없다는 거여. 이 교회 왔다가도 또 맷 달 있다가 딴 교회 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한데.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는 “목사님 한 번 보세요 저들은 그러진 않을 거래요.” 염려하지 마시고 받아 달라 하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열심히 신앙생활 잘 하시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서이 갔는데 그 목사님이 4월달에 가스게 되더라고. 장평이란 데로 가시고 우리 목사님이 진부 우리교회라고 있어요. 전도사님으로 총각 때 거기 와서 기시다가 우리교회로 오신 거여.
전 목사님도 얼마나 싹싹하시고 잘 하시는지. 자다가 보면 새벽에 차를 가지고 와요. 오신다 하면 우리가 깨어 있을 긴데 무조건 차를 가지고 와. 새벽에 우리 애들이 온 줄 알고 나가보니 목사님이 오셨더라고. 한 번도 새벽기도 안 빠지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오시는 거여.
네 자녀 잃은 슬픔
그러니깐 저 양반이 여섯 살 위니까 내가 오십 너이에 (교회에) 갔지. 마음이 편하더라고. 주님께 맡기고. 맘도 편하고. 집에 하난 일들도 뭐든지. 애들을 그리 키우느라 힘들었어요. 맷을 내버렸어. 그러느라고 내가 아주 속이 썩었지. 옛날에는 애들 키우기가 그렇게 힘들었지. 수로 아홉을 내가지고 넷을 내뻐리고 다섯을 키웠어요(아홉을 낳아 넷이 죽고 다섯만 살았다).
큰 거는 하나는 3학년 당기다가 초등학교 때. 저게 산에 꽈리 따러 갔다가 남새<뱀>한테 물려서 그래서 내 뻐렸지. 아들. 또 하나는 멀쩡하다가 밥을 안 먹고 자꾸 그래. 쪼끄마한 게 화장실에다 불을 싸놨어. 불을 싸니까 불이 타니까 놀래지 지가. 그래서 밥을 안 먹고 놀라서. 누가 갱기랍<말라리아에 먹는 약> 씨가운쓴 걸 먹이면 입맛이 돈다고 그걸 맥이라고 해. 그걸 맥이니까 금방 가더라고 해. 다섯 살 된 아들. 아주 잘생겼다고 남들이 그렇게 똑똑하고 잘생겼다고 하더니. 그리고 딸인데 또 그렇게 키우다 첫 돌 지나고.
아이고 그래 가지고 내가 이렇게 교횔 나갔잖아. 그런 일이 생겨가지고 교횔 나가니 그만 자꾸 마음에 떠오르더니 안심이 되더라고. 하나님 믿곤 기도원으로 그런 데로 댕기니 마음이 편해지고. 그런데 가서 은혜 받고 감사가 넘치고. 하나님 이상한 기적을 탁 보여주시고 이러더라고.
이상한 기적
하나님 기시지요. 하나님 기시고 말고래요. 아주 하나님 기셔 가지고 얼마나 감동을 많이 받았는지 몰라. 그래서 내가 이만큼 건강하지. 그때 같음 벌써 죽었을지도 몰러. 만날 속이 상해 한숨 수고. 안 믿는 사람은 모르지.
그날 주일날 저역부터 부흥집횔 할라 하는데 내가 무릎에 아파서 앉질 못했어요. 가서 수술 할라고 여름엔 못하고 겨울에 항기<한다는 게> 못 갔어. 근데 우리 교회서 부흥집회다 하는데 주일날 전날이지 토요일 날 새복인데 꿈을 꾸는데 하나님이 우리 집에 오셨더라고. 내 꿈에 두 분이 오셨어. 남자분이 두 분이 오셨는데 한 분은 키가 크시고 머리가 길더라고 하나님처럼. 회색 양복을 입고 점잖은 분이. 조금 작은 분이 한분 오시고. 내가 그 분을 보고 인사를 한다는 게. 웬 능력이 그러게 많으시냐고. 능력이 대단하시다고 무조건 그렇게 인살 했어요. 그러니 두 분이 이래 앉아서가는. “저가 뭐요. 저보다는 이분이 더 능력이 세신 분이래요.” 그 큰 양반이 작은 양반 보고. “이 양반은 호적을 다 가지고 계시는 분이래요.” 작은 양반보고 큰 양반이. 그래서 그러시냐고. 깨니 꿈이여. 아주 기분이 엄청 좋더라고. 저녁예배를 보러 갔는데. 안즉 강사님은 안 오시고. 좀 있다간 두루 강사님 오셨다 하믄 들어오시더라고. 오신데 그 밤에 꿈에 봤던 분이여. 아주 옷도 그 옷이고 인물도 그 인물인데 머리만 좀 짜르더라고<짧더라고>.
‘야 저 분이 밤에 우리 집에 왔던 분이구나 아야 귀한 강사님을 보여 주셨구나.’ 그래 뭐여 다리를 이렇게 아프다고 하니까 안술<안수기도> 해주시고. 기돌 해주면서 마치고 가면서는 “한 달을 새복기도를 열심히 나오시고 목사님도 열심히 해서 안수기돌 받으라” 그래서 두 달을 아주 새복기돌 4시면 하믄 오셔서 데려 내려 가셔서 손 얹으고 안수기돌 해주시고, 내가 아주 구불고<구르고> 다리가 막 그러더니만. 지금 이렇게 보면 앉기도 하고 쪼글태기<쪼그려 앉기>도 하고. 이래 나았잖아요. 한 3년 됐다.
“세상이 편해요”
그 전에 오산리 기도원 다녀와서는 조상도 우상으로 섬기지 말고 추도예배 드리라고 말씀을 (남편한테) 전했지요. 그렇게 하지 좋다 그러더라고요. 그랬는데 내 마음에 얼매나 이쁘고 좋은지 말도 못해. 세상에 그렇게 아주 뭐 우떻다고 말도 못하겠더니. 참 이상하더라고. 하나님 사랑이 기맥혀요.
(남편이) 차남인데 (시아주버님이) 난리 오돌<어딜> 가셨는지 알지 모르지. 딸 하나 놓고 난리를 만나서 피란하러 굴에 가셨다가 아군이 와서 도면증을 달라 그러면서 매탄으로 내려가매. 낼<내일> 찾으러 오라 갔는데 옆에 사람이 보니 찾으러 갔나봐. 그 부대가 청상 들어가다 다 죽었어. 척후병 부댈 따라갔다가 아주 전멸을 했어. 사무 친정서부터 마냥 그러다 인제 제사 안 지낸 지가 그러니께는 채려놓고도 한 십 오년 되고 안하고 지내는 제도 한 그러니까 올해 5년째구나. 아휴 그렇게 살았어요. 인제는 제사 안 지내. 세상이 편해요. 하나님 모시고 예배드리면 편한 걸.
■ 연보
1932년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지동리 7남매 중 장녀로 태어남
1949년 17세에 정선 신동면 운치리 5남매 중 차남 김진극(당시 23세)씨와 혼인
1951년 봄. 첫딸 홍역에 잃음(이후 2남 1녀를 사고 등으로 또 잃음)
1957년 장남 상기 출생
1959년 차남 웅기 출생
1961년 장녀 영희 출생
1964년 차녀 영숙 출생
1971년 3남 호기 출생
1986년 은성교회 새 신자 등록
1996년 노산교회 등록
2006년 남편 김진극씨 노산교회 등록 출석
2008년 권사 취임
■ 노산교회는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노론리 345-1에 있는 작은 시골교회다. 1968년 고창균 장로 등 교인이 개척했다. 시골교회의 열악한 사정 탓에 담임목사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2000년 이등용(당시 34세)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회는 활력을 찾아가고 있다. 20∼30명이던 출석 성도 수는 70여명으로 늘었고, 교인의 연령대도 다양해졌다. 노산교회는 전 성도가 악기를 다루는 교회로도 지역사회에 알려져 있다. 교회는 2년 전부터 지역 주민들을 초청해 성탄특별공연을 열고 있다. 이 목사는 지난 1월 러시아-터키-이스라엘에 이르는 여정을 육로로 횡단하는 선교 여행에 떠났다. 4월 초 귀국 예정이다. 윤여숙(36) 사모가 이 목사의 자리를 대신해 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임시로 꾸려가고 있다(033-332-3277).
평창=정리 이경선 기자·사진 윤여홍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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