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상대 ‘강제노역 임금지급 소송’ 김정주 할머니 “위안부라 오해… 평생 골목길로만 다녀”
중학생 손자가 물었다. “할머니, 위안부가 뭐예요. 할머니, 위안부 갔다 왔어요?” 할머니가 대답했다. “할머니 위안부 아니야. 할머니는 저 맨(먼) 후지코시 공장에 가서 일했어. 누가 할머니 보고 위안부라고 하디.” 호기심으로 가득 찬 손자의 눈동자 앞에서 할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위안부라는 오인(誤認)은 김정주(79·서울 문정동) 할머니를 평생 괴롭혔다. 할머니는 수십년 동안 일부러 골목길로 다녔다. 사람들이 수군댈까봐 무서웠다. 아들에게도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일본을 다녀왔다는 얘기를 못했다. 일본 법원에 제기할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준비하던 2002년이 돼서야 털어놨다.
근로정신대는 일제가 전쟁 막바지인 1940년대에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결성한 조직으로 주로 10대 여성이 모집 대상이었다. 1944년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표되면서 공식화됐다.
근로정신대는 성적 착취가 이뤄진 종군위안부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정신대 출신에 대한 주변의 편견으로 말 못할 고초를 겪었다.
김 할머니는 전남 순천남국민학교 6학년 때인 1945년 2월 일본 도야마현으로 가는 배를 탔다. 일본인 여성 담임교사는 일본에 가면 언니를 만날 수 있다고 거짓말했다. 언니 김성주(81) 할머니는 1944년 5월 나고야로 갔다. 언니도 ‘일본 가면 공부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았다. 자매는 똑같이 임금도 못 받고 미쓰비시중공업과 후지코시 군수공장에서 각각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김 할머니는 정신대 전력이 부끄럽다고 했다. 그리곤 계속 흐느꼈다. “군인으로 갔다가 돈 못 받아서 우리랑 같이 데모하는 빼빼 마른 할아버지도 아직까지 우리를 위안부라고 해요. 그러니 넘(남)들은 (위안부로) 인식 안 하겠어요?”
할머니는 35세 때 이혼했다. 전 남편은 ‘일본 가서 뭐 했느냐. 몇 사람을 상대했느냐’며 할머니를 학대했다. 참다못한 할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떡을 이고 다니며 팔아 자식을 키웠다. 재혼 생각은 안 해봤느냐고 물었다. “누가 이북 사람을 중신해준다고 했는데 싫다고 했어요. 아이코, 나 또 버림 받으라고.”
김 할머니는 손자를 자신의 손으로 키웠다. 아들은 결혼생활에 실패했고, 지병으로 돈도 벌지 못하고 있다. 김 할머니와 아들, 손자 이렇게 세 식구는 매달 60여만원의 정부 지원금으로 반지하방에서 어렵게 산다.
할머니는 7일 다른 피해 할머니 5명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일본 도야마현에 도착했다. 8일은 할머니들이 일본 기업 후지코시를 상대로 낸 소송의 2심 선고가 있는 날이다. 김 할머니를 비롯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출신 23명은 2003년 미불임금 등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다. 1심인 도야마지방재판소는 소송을 기각했다. 1965년 한일협정에 따라 개인 청구권은 사라졌다는 게 이유였다.
김 할머니는 이번에도 승소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2심 선고 후 기자회견, 집회 등을 통해 일본 정부와 법원의 각성을 재차 촉구하는 ‘행동’에 나설 생각이다. “우리는 늙어서 시간이 없응께. 후지코시 사장이 도쿄로 이사갔는데 그 집 앞에 가서 기어이 답변을 받아올랍니다.”
권기석 기자 key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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