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가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부인 한인옥 여사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 부인 권양숙 여사는 남편 못지 않게 맹렬히 표밭을 누비고 있다. 퍼스트레이디 후보인 두 사람은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장과 상가는 물론 군부대 교회 등 표가 나올만한 곳은 어디든 밤 늦도록 찾아다니고 있다. 너무 나설 경우 후보에게 나쁜 이미지를 준다고 판단,조심스럽게 처신하면서도 때론 즉석 연설을 하기도 한다. 두 사람 모두 명 연설가에 속한다.◇한인옥 여사
한여사는 매일 새벽 5시 정각에 눈을 뜬다. 자정을 넘어 잠자리에 드니까 5시간을 채 못 자는 셈이다. 몸이 천근만근이지만 어금니를 꽉 깨문다. 그리곤 묵상을 한다. 앞으로 9일. 이후보의 건강과 마지막 승리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초조하게 벽시계를 쳐다보며 직접 머리손질을 하고,화장을 마친 뒤 깨끗하게 옷을 차려입는다.
이후보가 집에 머물때는 아침을 손수 차린다. 이후보 자신이 건강관리에 워낙 열심이기 때문에 식단을 짜는 데 크게 신경 쓸 일은 없다. 다만 피로회복에 도움이 되도록 싱싱한 야채류 등 비타민이 풍부한 반찬과 이후보가 가장 좋아하는 멸치,된장찌개를 준비한다. 한여사가 서울 옥인동 집을 나서는 것은 오전 8시 전후. 스케줄은 분 단위로 짜여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 평균 5∼6개의 스케줄이 수첩에 빼곡히 적혀있다.
한여사는 지난달 27일 대선 후보 등록 이후 이후보를 따라 부산 등 영남권에 공을 들여왔다. 주로 서청원 대표 부인 이선화씨와 권철현 후보 비서실장 부인 김경자씨와 함께 다녔다. 부산·경남 지역 노풍 차단에 일조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한여사는 지원유세에서 살림하는 주부,어머니의 인상을 심는데 주력한다. 주로 재래시장에서 살다시피한다. 소탈하게 파카점퍼 차림으로 슈퍼마켓 양장점 약국 등 아무곳이나 들어가 허리를 절반으로 굽히고 “엄마들이 편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좌판대 상인들의 흙 묻은 고무장갑도 덥썩 움켜잡는다. 한씨를 가리키며 “TV화면이랑 똑같데이”라고 수군거리는 상인도 적지 않아 후보 못지 않게 높은 인지도를 실감하고 있다.
가는 곳마다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곳은 나환자촌이다. 장남 정연씨가 1997년 대선때 전남 소록도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것과 무관치 않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얘기다.
점심은 주로 독거 노인 무료 배식에 참여,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 해결한다. 때로는 여성 근로자들과 구내식당에서 간담회를 겸하기도 한다. 카니발 승합차로 이동하면서 틈틈이 토막잠을 잔다. 불과 몇분을 움직여도 습관처럼 눈을 감게 된다는 전언이다. 도착했다는 수행비서의 말에 눈을 번쩍 뜨고는 옷매무새를 만진다.
저녁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간단히 해결한다. 주 메뉴는 설렁탕이나 비밥밥. 저녁 9시쯤 파김치가 돼서 집에 돌아온 한여사의 첫마디는 남편 걱정. “나는 괜찮은데…”.
한여사는 경기여고 서울대를 나온 재원이지만,이후보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주부였다. ‘활동적 여성’으로 탈바꿈해 지방을 돌며 남편의 경쟁력을 알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후보를 내조하면서 가장 신경쓰는 부분은 너무 ‘튀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부인 힐러리나,토니 블레어 영국총리 부인 셰리와 같은 진취적인 패턴은 우리정서와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아울러 자원봉사에 공을 들여왔다. 한여사는 이후보가 신한국당 대표에 취임한 지난 1997년 3월부터 서울 탑골공원의 결식노인 무료배식과 성남시립아동병원의 지체장애아동돕기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홀트아동복지회 대한사회복지회 한국복지재단 등 10여개 자선단체의 후원자로도 활동중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지체아동들에게 밥 먹여주고 목욕시켜주는 일을 하면서 소외계층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이후보한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여과없이 전달하는 것도 한여사 몫이다. 이를 위해 짬나는대로 학교동창,남편의 법조계 선후배,여성계 인사들과 부지런히 만나고 다닌다. 한여사는 듣기 좋은 말보다 질책성 여론이나 충고를 즐겨한다.
한여사는 이후보가 당선되면 장애인시설 확충과 사회적 관심 제고에 일조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대통령이 미처 돌보지 못하는 곳,여성의 섬세함이 필요한 곳에 작지만 힘이 돼야 한다면서 기회가 닿는다면 어린이,노인,여성 등 소외되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남편 자랑하는 것 같아 쑥스럽지만 잘 해 내실 거라고 믿어요. 바른 생각과 원칙으로 흐트러진 것들을 바로 잡고,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국민들께서 믿을 수 있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노력은 사람의 몫이지만 그 결실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5년간 열심히 했으니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요”. 1997년에 이어 두번째 대선에 도전하는 한여사의 말에는 비장함이 배어 있다.
◇권양숙 여사
서울 명륜동 노후보 자택에서는 새벽 5시 정각이면 어김없이 ‘철컥’하고 대문이 열린다. 노후보에게 조간신문을 챙겨주기 위해 권여사가 문을 열고 나온다. 예전에는 신문에 난 부정적 기사를 노후보에게 읽어주고,노후보가 미쳐 챙기지 못한는 분야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등 신문 모니터가 권여사의 몫이었다. 하지만 요즘 권여사의 생활은 신문 볼 짬조차 내기 어렵다. 지난달 27일 대선 후보 등록과 동시에 후보 유세에 가세한 이후로는 숨돌릴 겨를이 없을 정도다.
남편의 아침식사와 출근준비를 챙기고,직장에 다니는 아들 건호씨(30)와 딸 정연씨(28)의 출근인사를 받고 나면 오전 8시30분. 방송출연 등 특별한 일정이 없을 때는 직접 화장과 머리손질을 한다. 얌전해보이면서도 자기한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감색이나 회색 투피스 정장을 차려입고 문밖을 나서는 시간은 대략 오전 9시 전후.
조용한 행보지만 일정은 늘 빡빡하다. 방문지마다 여성단체 관계자,주부,언론인,각종 직능단체 대표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시간을 5분,10분씩 쪼개야 한다. 요즘에는 노후보의 명예선대위원장로 내정된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 부인인 김영명 여사와 함께 나란히 공조내조를 과시하는 이벤트를 마련하는 방안도 구상중이다.
권여사는 핵심 승부처인 부산 진주 진해 대전 등 영남권과 충청권을 주로 찾는다. 동행자는 중앙선대위 여성특보이기도 한 김화중 의원이다. 하루 5∼6곳의 행선지 가운데서 권여사가 늘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은 노후보의 서민적 이미지를 부각시킬수 있는 재래시장이다.
권여사는 행인들과 상인들의 손을 맞잡고 “기호 2번 노무현 후보 안사람 인사 나왔습니다. 도와주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연신 허리를 깊숙히 숙인다. 닭잡던 손,생선 자르던 손,파 줄기를 매만지던 흙투성이 손을 가리지 않는다. 상인들이 “냄새 납니다” “젖었는데요”라고 손을 빼려해도 권여사는 두손으로 덥석 감싼다. “TV에서 본 것 보다 젊습니다” “우리 자식이 노사모예요”. 시민들의 격려에 잠시 피로를 잊는다.
빡빡한 일정에 쫓기다보니 점심은 버스 안에서 도시락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다. 샌드위치,햄버거,김밥 등이 주 식단인데 권여사는 “빵을 워낙 좋아해서 다행이에요”라고 웃는다. 저녁도 국수 등으로 간단히 해결한다. 하루 동선이 200∼300km는 기본이다. 권여사가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밤 11시쯤. 선거 날짜가 가까와질수록 남편인 노후보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날도 많아졌다.
권여사는 정감있는 인상과 활달한 성격이 강점이다. 구수하면서도 튀지 않는 말솜씨와 탁월한 유머감각으로 그런 면에서는 남편보다 더 경쟁력 있다는 찬사를 받기도 한다. 주변에서는 소탈한 아줌마로,노후보의 온라인 팬클럽인 노사모에서는 노짱 반쪼가리란 애칭으로 통한다.
그러나 원래는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권해도 나서지 않는 소극적인 스타일이었다. 얼마나 앞에 나서기를 꺼려했는지 올해 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도 인터뷰를 모조리 피해다녔다. 소매를 걷어붙이고,활발한 내조행보에 나선 것은 노후보가 당 안팎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부터다. 스킨십이 부족하다는 남편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의원들 모임을 주선하기도 하고,당직자들과 식사를 함께하며 노후보를 도와달라고 호소해왔다.
권여사는 “선거기간 동안 보육시설과 양로원 등 사회복지시설 방문과 각종 여성 강연회 참석 등을 통해 노후보의 서민 이미지를 뒷받침하고 여성표를 잡는데 마지막날까지 주력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노후보가 챙기지 못한 여성단체나 불우시설 등을 방문하면서 지지세를 확산시킨다는 방침이다.
권여사는 노후보가 대통령이 돼야 하는 이유에 대해 “농민의 아들로 서민의 애환과 삶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말했다. 당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사법고시 전에 ‘상고 나와서 되겠나’,올해 봄 당 후보 경선 때는 ‘기반이 없어서 되겠나’,후보 단일화 때는 ‘과연 되겠나’ 했는데 매번 됐다”는 유머로 대신했다.
“반드시 당선될 것으로 믿습니다. 후보단일화가 이뤄진 데 대해 큰 역사적 책임감을 느낍니다. 새 정치를 바라는 국민의 염원이 반영된 만큼 반드시 노무현 후보가 된다고 믿습니다. 대통령 후보가 된 것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라는 뜻일 테니까요”
남편 능력에 대한 권여사의 믿음은 신앙과도 같다.
조수진기자
창간 14주년 특집 / 대통령 후보 ‘빅2’ 부인들의 내조 2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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