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에 들어가라고요?” 20여년 전 고등학생 때 참여한 교회 고등부 겨울 수련회에서 ‘관 들어가기’ 체험을 했다. 나무로 된 직사각형 관에 들어가 5분간 자신의 삶을 생각하자는 취지의 죽음 교육이었는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관에 들어가자 못 나오게 관 뚜껑을 닫았고 비좁고 어두운 곳에서 강제로 묵상을 했다.
10대 소녀가 평소 죽음에 대해 생각할 리 없었다. ‘나에게도 언젠가 죽음의 순간이 올 수 있겠다. 훗날 진짜 죽음을 앞두고 나는 어떤 생각을 할까.’ 1~2분 정도 지났을까. 답답해서 “제발 열어주세요”라고 소리 질렀다. 죽음 자체를 생각하는 게 당시로서는 충격적이고 무서우며 낯선 경험이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을 보면 죽음 교육의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은 평소 죽음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죽음에 대해 반추하게 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은 무엇을 생각할까. “만약 신의 가호가 있어 살 수 있다면 1초라도 낭비하지 않겠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서 주인공 미쉬킨 공작이 사형 집행 직전에 느낀 절절한 감정을 담은 대사다. 이 장면은 실제 도스토옙스키가 겪은, 사형 집행 직전 극적으로 감형받은 현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다. 미쉬킨 공작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극히 짧다는 사실 앞에서 삶과 시간의 소중함을 절실히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죽음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절박함과 시간의 소중함은 기독교 신앙에서 더 깊은 의미가 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저주의 끝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향한 관문이다. 기독교에서는 죽음이 인간 삶의 완성이며 영원한 삶으로의 초대로도 이해된다. 결국 죽음은 삶의 종결점이 아닌 하나님의 영원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인간의 유한함을 자각하고 이 세상에 집착하지 말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경건하게 살아가야 함을 일깨우는 영적 교훈이 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메멘토 모리는 삶을 부정적으로 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성공과 승리에 도취하지 말고 마지막을 준비하는 삶처럼 겸손, 절제, 영원한 가치 추구를 강조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죽음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많은 교회가 부활을 설교하면서도 정작 장례 현장에서는 검은 상복과 완장, 유교식 절차를 답습한다. 신앙과 실천 사이의 괴리다. 최근 일부 교회가 이런 모순을 깨고 ‘부활의 언어’로 장례문화를 재정의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한 목사는 모친의 장례식에 ‘천국 환송 예배’라는 이름을 붙이고 유족과 조문객 모두에게 검은색이 아닌 밝은색 옷을 입어 달라고 요청했다. 장례식장은 애도가 아닌 찬양과 감사가 넘치는 예배 현장이 됐다.
또 한 원로 음악가는 가족 50여명을 초대해 자신이 살아온 90년을 돌아보는 ‘엔딩파티’를 열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가족과 나누는 모습이었다. 이처럼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성경 속 신앙의 선조들도 그렇게 살았다. 야곱은 죽음 직전 자신의 장례에 대해 구체적인 의사를 밝히고 자녀들을 축복했다.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준비하며 그 과정에서 생의 의미를 완성했다.
메멘토 모리는 우울한 염세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오늘을 더욱 충실하게 살게 만드는 영적 훈련이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결국 더 잘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끝을 아는 사람만이 시작을 제대로 살 수 있다.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오늘 하루를 낭비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메멘토 모리가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선물이다.
김아영 종교부 차장 sing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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