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편을 잃은 아내를 과부라 한다. 아내를 잃은 남편은 홀아비, 부모를 잃은 아이를 고아라 부른다. 하지만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자들을 부르는 명칭은 따로 없다. 그 상실이 너무 극심해서일까. 시인들도 입을 굳게 닫았고 성직자들조차 침묵 중이다. 인류는 그 이름을 영원히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없어서 부르지 못하는 이름, 있어도 부를 수 없는 이름. 이를 참척지변(慘慽之變)이라 부른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이동성 목사가 아내의 책이라며 추천사를 부탁했을 때 나는 아찔했다. 아들을 잃은 이야기가 아닌가. 거기다 본인의 고통 역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어느 날 뇌전증(간질병)이 찾아와 몸 깊숙이 박힌다. 수십 년 고통의 시작이었다. 병실을 위아래로 두고 입원해 있으면서 자식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처참했다. 그 맘을 뉘 헤아리랴.
결국 며칠을 고민하다 붙잡은 생각이 하나 있었다. 자식 잃은 부모들에게 이름이 없듯 하나님에게도 이름이 없잖은가. 그렇다면 이름 없는 하나님만은 그들의 마음을 아실까.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파 다시 욥기를 찾아 읽고 또 읽었다. 여지껏 알고 있던 욥기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알게 된 사실은 욥기의 주인공은 욥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
이 전제는 성경 해석의 방향을 바꾼다. 불운을 향하던 시선을 하나님의 임재로 돌려놓는다. 욥기는 고난의 원인을 따지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는 책이다. 신학자 루돌프 오토는 이를 ‘누멘(Numen)’이라 불렀다. 누멘은 흐림(Mysterium)이고 떨림(Tremendum)이며 끌림(Fascinans)이다. 내가 보기에 욥기는 영락없이 이 세 흐름으로 다가온다.
욥기의 하나님은 전적으로 다른 분으로 다가오신다. 이유는 닿지 않고 설명은 모자란다. 넘쳐나는 충고와 변명이 부질없다. 정작 위로는 부재한, 마실 물 없는 한재(旱災)와 같다. 욥은 하나님의 폭풍 질문 앞에 입을 닫는다. 고요가 찾아든다. 이 침묵은 패배가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경외다. 어둠 속에서야 별이 빛나듯 내 인생의 ‘흐림’이 나의 시선을 오롯이 하나님께로 모으게 한다.
내 인생 미스터리는 곧 ‘떨림’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고통을 크기로 계산하지 않으신다. 대신 “견디라” 하신다. 희망은 고난보다 장수한다는 것을 배운다. 폭풍 속 음성은 논증이 아니다. 세계의 광대함 자체다. 그 앞에서 인간은 낮아지고 마음은 맑아진다. 삶의 깊은 파장이 여기서 시작된다.
그 떨림은 사람을 밀어내지 않는다. 끝내 ‘끌림’으로 이끈다. 그분이 나를 끌어당기신다. 그리고 나를 안아주신다. 이유보다 임재의 현실이 더 분명해진다. 욥은 정답 대신 관계를 붙든다. 신뢰가 자라고 회복이 열린다. 손익의 대차대조표가 아니다. 관계의 회복이 가져다준 풍요와 향유의 기쁨이다. 행여 어두운 밤길을 걸을지라도 홀로 걷지 않게 하시리라는 확신이다.
김인자 사모가 쓴 ‘멈출 수 없는 눈물’은 이 길을 오늘의 언어로 증언한다. 절절한 고백이 내 마음을 흔든다. 파시난스(끌림)의 파장이 밀려왔다. 자신에게 찾아온 부끄러움을 넘어 수치스럽기도 했을 간질의 고통, 거기다 참척지변의 태풍까지 덮치지 않았던가. 아들을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심정은 미스테리움(흐림) 그 자체다. 그의 미스테리움이 나의 ‘왜 하필 나에게(Why Me)’를 부끄럽게 만든다.
나는 입을 닫는다. 나는 그것이 영혼의 개기일식이었음을 깨닫는다. 일식은 태양의 부재가 아니다. 달에 잠시 가려졌을 뿐이다. 흐림(어둠)이 사라지자 찾아든 것은 끌림이고 떨림이다. 목 놓아 울던 슬픔의 눈물이 누멘의 눈물로 바뀐다. 이것이 바로 ‘멈출 수 없는 눈물’이다.
욥이 두 손을 입에 갖다 대고 멈추었다면 김인자 사모는 입을 벌려 찬양한다. 그 아름다운 찬양이 나에게 묻는다. “넌 왜 안 되지(Why not)” 나를 모질게 괴롭히던 ‘Why Me’도 숨죽인 채 찬양에 귀 기울인다. 그제야 깨닫는다. 찬양의 지문이 트레멘둠이고 파시난스라는 것을. 멈출 수 없는 눈물이 말을 걸어온다. “고난을 허비하지 말라.”
고난을 낭비하지 않는 길은 해답을 움켜쥐는 데 있지 않다. 임재를 배우고 익히는 데 있다. 흐림을 피하지 말고 떨림을 견디라. 그러면 끌림이 온다. 개기일식이 지나가듯 주의 빛은 다시 드러난다. 우리는 그 빛 속에서 다시 선다. 다시 산다.

동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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