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 생각보다 괜찮네.” 가스폭발로 화상 입은 자신의 얼굴을 2년여 만에 거울을 통해 마주한 13세 소녀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다. 전신에 화상을 입고 기적처럼 살아난 뒤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얼굴을 마주한 건 자신의 치료를 돕던 성형외과 선생님이 속눈썹 문신 시술을 해준 뒤였다. 의사가 건넨 작은 거울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든 아이는 천천히 자신의 눈과 코, 입을 살폈다. 수십 번의 수술 끝에 되찾은 모습은 상상했던 것만큼 무섭거나 낯설지 않았었다고 이제 33세가 된 최려나씨는 회고했다. “하나님 사랑 속에 여러 도움을 받아 수십 차례의 수술과 긴 재활의 시간을 지나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라는 걸 그때 알았던 것 같아요.”
최씨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깊은 절망의 자리에서 기적처럼 일으킴을 받고, 그때 만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 화상 생존자’라고 말한다. 화상 경험자 공동체 ‘위드어스(With Us)’를 만들고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치유를, 누군가에겐 용기와 새로운 희망을 건네는 그를 최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려나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해”

중국 지린(吉林)성 출신인 최씨는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교내 방송부에서 활동하며 아나운서를 꿈꾸던 활발한 아이에게 시련이 닥친 건 2003년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엄마를 도우러 부엌에 들어간 순간 갑작스러운 폭발이 일어났다. 최씨는 “폭발음에 무서워서 눈을 감았는데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뛰쳐 나왔다”며 “엄마가 밤새 가스가 샌 걸 모른 채 불을 붙인 순간 사고가 났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고 말했다.
사고는 최씨 몸 95%에 3도 화상을 입혔다. 의사는 생존 가능성이 5%에 불과하다고 했다. 함께 치료받던 어머니는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최씨의 상처 난 피부에서는 고름이 흐르고 살갗이 짓무르는 극심한 통증이 이어졌다. 죽은 피부를 벗겨내는 드레싱 치료는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 것 같았다”고 최씨는 회상했다.
“성장기에 뼈는 자라는데 피부는 수축되다 보니 몸이 뒤틀렸어요. 집에서 쉬다 병원 치료를 받기를 반복했죠. 가족들은 제가 상처받을까 봐 거울을 모두 종이로 가려놨지만, 숟가락이나 엘리베이터에 비친 제 모습은 스스로 보기에도 끔찍했습니다. 절망 그 자체였어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집을 팔아 손녀의 치료비를 마련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돈이 없어 더는 병원에 갈 수 없게 됐을 때 그 소식을 기사로 접한 중국천진엘림교회 이윤낙(68) 장로가 찾아왔다. 이 장로는 “려나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한단다”라며 성경책을 건넸다. 그러나 고통 속에 있던 아이에게 말씀을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누구시지’라는 마음으로 성경을 펼쳐봤지만 ‘정말 나를 사랑하는 신이 있다면 이런 고통을 주실 리 없다’는 원망만 앞섰다. 최씨는 “그날 밤 하나님께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사고 전 제 모습으로 돌려주신다면 당신을 믿겠다’고 기도했다”고 고백했다.
그 기도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생각지 못한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잡지사를 운영하던 이 장로가 최씨의 사연을 알리면서 베이징은 물론 한국의 한강성심병원과 광주의 성형외과 이재화 원장을 만나 치료를 이어갈 수 있었다.
최씨는 “아무런 대가 없는 사랑이었다. 돌이켜보면 사람을 통해 일하신 십자가의 사랑이었다”며 “그 사랑이 절망 속에 있던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의 길로 이끌었다”고 고백했다. 절망 속에서도 조건 없이 사랑하신 하나님이 궁금해지면서 최씨는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나는 그저 사랑스러운 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신을 직면할 수 있게 됐다.
인생 멘토, 이지선 교수를 만나다

이후 10년간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40번이 넘는 수술과 치료를 견뎠다. 스무 살이 됐을 때 친구들은 대학으로 진로를 넓혀가고 있었지만, 치료로 학업이 중단된 그는 혼자만 초등학교 4학년에 멈춰 있는 듯한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때 이 장로와 이화여대 사회복지학 이지선 교수가 그에게 공부를 권했다. ‘지선아 사랑해’ 저자이기도 한 이 교수는 2000년 교통사고로 전신 화상을 입고도 공부를 계속해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 교수는 최씨에게 당당함을 처음 알려준 인생 멘토다. 최씨는 “열세 살 때 어린이 화상환자 후원단체를 통해 처음 지선 언니를 만난 날, 반팔을 입고 상처 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모습에 무척 놀랐다”면서 “그때 ‘화상을 입어도 이렇게 당당하게 살 수 있구나’를 배웠다”고 회상했다.
이 교수는 또래보다 늦게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그를 위해 중국으로 책을 보내 격려했다. 물심양면으로 도운 이 장로와 자원봉사로 학습을 도운 톈진(天津) 한국국제학교 교사들과 유학생들도 있었다. 많은 이들의 격려 속에 새벽까지 공부에 매달린 그는 2013년 4월 평균 94.5점으로 검정고시에 합격, 이듬해 이화여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오랜 시간 눈물로 함께해 준 가족, 그리고 나를 위해 응원하고 기도해준 분들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었어요. 지선 언니는 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직접 화장품도 사주고 화장법을 알려줬죠. 언니 덕분에 화상 입은 얼굴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으며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너는 할 수 있어’라는 언니의 말은 어떤 위로보다 큰 힘이었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화상 경험 청년 공동체 ‘위드어스’
대학교 2학년이던 2015년 10월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피닉스 소사이어티가 주관한 ‘세계 화상 대회(World Burn Congress)’에 참가했다. 불 속에서 다시 일어난 이들을 ‘화상 환자’가 아닌 ‘생존자(Survivor)’로 부르던 현장이었다.
“참가자 중에 화상으로 다리를 잃고 의족을 찬 사람이 있었어요. 바지를 입어서 의족을 숨기는 게 아니라 미니스커트를 입었더라구요. 그때까지만 해도 밖에 나갈 땐 모자를 쓰고 한여름에도 긴소매를 입는 등 늘 ‘완전 무장’하던 제게 그 모습은 충격이었지요.”
전 세계 화상 생존자들이 자연스럽게 상처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며 그는 처음으로 모자와 마스크를 벗을 용기를 얻었다. 1000여명이 함께한 인디애나폴리스 시청 앞 걷기 행사에서 화상 입은 이들을 존중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는 진정한 치유와 회복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했다.

2년 뒤인 2017년 그는 한국에서 청년 화상 경험자들의 자조모임 위드어스를 세웠다. 화상의 아픔을 홀로 견디지 말고 또래와 소통하며 함께 치유하자는 마음이었다. 화상 경험자와 가족 소방관 의료진이 함께하는 청계천 걷기 행사와 사진전도 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자조 모임은 잠시 중단됐지만 2년 전 온라인 굿즈 판매를 시작으로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내년엔 더 많은 사람이 화상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팝업스토어도 오픈한다.
이런 활동을 경험하며 그의 진로도 사회복지학으로 바뀌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이대 영문과를 졸업한 그는 사회복지학 전공으로 다시 석·박사 과정까지 마쳤다.
최씨는 “엄마의 이름이 ‘이화’였는데 10년 동안 이화여대를 다니며 늘 엄마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더 열심히 살아냈던 것 같다”며 “엄마도 자랑스러워하실 듯하다”고 웃었다. 현재 포항 한동대와 아시아연합신학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확인한 은혜를 거듭 감사해 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을 만난 뒤 하루하루가 새롭고 감사로 가득했어요. 어떤 모습이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믿어요. 타인의 시선이나 상처를 보는 대신 하나님께 시선을 두면 세상이 우리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질 거예요. 매 순간 사랑하고 감사하세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삶의 이유이자 축복이니까요.”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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