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박물관은 문턱이 아니라 품이어야 한다

지난주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성공 이후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로 북적인다지만, 평일 오후의 박물관은 의외로 한산했다. 늦가을 거울못에는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비쳤고, 곱게 물든 나뭇잎 사이로 새소리가 들렸다. 전시실은 쾌적했고, 유물 앞에 선 사람들의 시선은 고요했다. 그러나 뮤지엄숍만큼은 앞사람의 뒤통수를 보며 걸어야 할 정도로 붐볐다. 특히 케데헌의 호랑이 캐릭터를 닮은 ‘까치호랑이 배지’ 앞에는 직원이 따로 서 있을 만큼 인기였다.

요즘 뚝섬한강공원에 가면 청담대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예전에는 올림픽주경기장을 배경으로 삼았다면, 이제는 케데헌에서 결투가 벌어졌던 청담대교가 ‘성지’가 됐다. 최근 방한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이제 아무도 팝이나 로큰롤, 재즈를 듣지 않는다. 세계인이 듣는 건 K팝이다”고 말했다. 방탄소년단의 RM은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케데헌의 인기와 K팝의 열풍은 세계의 시선을 한국 문화로 옮겨놓았다. 그 파도가 닿은 곳이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이다.

지난 6월 공개된 케데헌의 인기에 힘입어 박물관 관람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올해 목표였던 500만명을 이미 넘어섰다. 관람객 수로만 보면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바티칸박물관, 대영박물관,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이어 세계 주요 박물관 중 다섯 번째 규모다. 해외 대형 박물관이 고대 이집트나 르네상스 미술 등으로 관람객을 모은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수치다. 달항아리의 단아함, 호랑이 민화의 익살, 백자의 여백에 외국인과 우리 모두가 매료됐다. 올해 뮤지엄 굿즈(뮷즈) 매출도 개관 이래 최대인 300억원을 넘겼다.

그런데 관람객이 몰리자 박물관은 예약제와 유료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유홍준 관장은 국정감사에서 “내년 상반기 예약제를 도입하고 유료화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관람 편의와 주차장, 카페 등 시설 확충을 위한 조치라고 했다. 일리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공공기관이 유료화를 먼저 언급하는 건 너무 손쉬운 해법이다. 이미 특별전은 2만원 가까운 입장료를 받고 있다. ‘중앙’ 박물관의 결정은 ‘지방’ 박물관에도 영향을 미친다. 박물관의 성공을 수익이나 관람객 수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국립박물관은 기업이 아니라 국가의 얼굴이다. 흥행보다 중요한 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문’이다.

2005년 용산 시대를 연 국립중앙박물관은 처음엔 2000원의 입장료를 받다가 2008년 무료로 전환됐다. ‘공간과 소장 유물을 국민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로부터 17년 동안 박물관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었다. 한여름엔 시원한 쉼터가 되고, 한겨울엔 포근한 휴식처가 됐다. 아이들이 역사와 처음 만나는 곳이었다. 500만 관람객을 가능하게 한 힘은 바로 그 ‘열림’에 있었다. 유료화와 예약제가 그 문턱을 높일까 걱정이다. 예약제에도 장점이 있지만, 마음 닿는 대로 찾아가던 발걸음을 막을 수도 있다. 문화의 접근성을 잃는 건 한순간이고, 되돌리긴 어렵다.

수익을 늘릴 길은 다른 데 있다. ‘오픈런’으로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뮤지엄숍으로 먼저 향한다. 전시 관람보다 굿즈를 사러 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참에 뮤지엄숍을 외부로 확장하면 어떨까. 홍대나 성수, 인천공항 등지에 국립박물관 브랜드숍을 여는 것이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전시장 밖에서도 뮤지엄숍만 따로 운영해 큰 호응을 얻듯, 전통문화 굿즈를 세계에 알리는 창구가 될 수 있다. 또 대영박물관이나 미국 스미스소니언미술관처럼 입장료는 무료이되 자발적 기부를 유도하거나, 한국 문화에 매력을 느낀 글로벌 브랜드의 후원을 받는 길도 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곳엔 기꺼이 지갑을 여는 시대다.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 뒤, 유료화는 마지막에 검토해도 늦지 않다.

‘국립’이라는 이름만큼 그 문을 오래 그리고 끝까지 열어두길 바란다. 입장료가 몇천 원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문턱이 될 수 있다. 문턱이 높아지면 발길이 줄고, 발길이 줄면 기억도 멀어진다. 박물관은 문턱이 아니라 품이어야 한다. 그 품이 넓을수록 문화의 품격도 자란다. 그 품 안에서 우리는 역사를 만나고, 미래를 배운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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