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닐세.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네.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지. 따라서 우리가 살아 있든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네. 살았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일세.”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쓴 글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을 향해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쁜 것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도발이다. 죽음이 해롭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오직 살아있는 동안이나 사망 이후뿐이다. 하지만 일단 죽고 나면 해를 입을 ‘주체’가 없으니 죽음이 나쁘다고 할 수 없고, 살아있을 때는 ‘주체’를 찾기는 쉽지만 죽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이 그 ‘주체’에 어떤 해를 입히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따라서 죽음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에피쿠로스의 이런 주장은 책의 출발점이자 ‘죽음은 나쁜 것’이라는 반론의 축이다. 미국 트리니티대 철학교수로 1994년부터 ‘죽음의 철학’을 강의하는 저자는 책의 제목처럼 ‘죽음을 철학한다’.
우선 ‘살아 있음’과 죽음의 다양한 의미를 탐색한다. 살아 있다는 것과 죽음은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자기 인식과 사고 능력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관점(인격 본질주의)에서는 심리적 연속성이 유지될 때 우리 존재가 지속된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동물이라는 관점(동물 본질주의)에서는 우리가 동물인 상태를 유지하는 한에서, 우리가 본질적으로 정신 그 자체라는 입장(정신 본질주의)에서는 정신이 온전하게 유지되는 경우에 우리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연히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죽음의 의미도 달라진다. 각각의 관점이 모든 것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뇌를 제외한 모든 기능이 중단됐다거나 아니면 몸은 멀쩡한데 뇌의 기능이 정지된 사람을 살아 있다고 동물적 관점에서는 설명할 수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명확하게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심각한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동물’로서, ‘정신’으로서는 살아있지만 ‘인격’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정신이나 인격이 형성되지 않은 태아의 경우 동물적 관점에서는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생명체가 아닐 수 있다.

저자는 일단 죽음을 ‘생명 과정의 돌이킬 수 없는 중단’이라고 해 두지만 죽음의 개념은 역시나 모호하다. 생명이 끝나가는 과정을 뜻하는 ‘죽어감’으로 이해할 수 있고, 생명이 끝난 상태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에피쿠로스의 주장에 맹점이 있다. 에피쿠로스가 의미하는 죽음은 ‘죽은 상태’만 의미할 뿐 ‘과정으로서의 죽음’은 배제했다.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셨을 때 그 독은 심장과 폐를 마비시키는 동안, 즉 살아있는 동안 극심한 고통을 안겨준다. 에피쿠로스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아타락시아’(마음의 평온)의 경지에 이르도록 돕는 것이다. 저자는 “그가 ‘종결 죽음’과 ‘죽은 상태’에 대한 우려만 없애주고 ‘과정 죽음’이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에 대한 불안은 남겨둔 것이라며 우리는 살아생전 결코 ‘마음의 평온’을 누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의 영향에 대해 덧붙여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젊은 나에 죽은 사람을 보면 안타까워한다. 그가 살아 있었으면 성취했을 삶의 풍성함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용어를 빌리면 살아 있었다면 누렸을 좋은 것들을 죽음이 ‘박탈’하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 된다. 저자는 “죽음은 시간을 초월해 우리에게 해롭다. 죽음은 죽지 않았을 때보다 우리 삶을 더 나쁘게 만든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는 내내 우리에게 해롭다”고 말한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좋은 것들뿐만 아니라 나쁜 것도 앗아갈 수 있다. 저자는 “삶을 계속 사는 게 좋은 일이라면 죽음은 우리에게 해로울 수 있고, 삶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이라면 죽음은 오히려 이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의미에서 “자살과 안락사가 도덕적으로 허용돼야 한다”는 다소 도발적이고 논쟁적인 주장을 펼친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자살과 안락사는 죽음과 죽음의 방식이 당사자의 이익에 부합하고, 도덕적 행동 능력을 가진 주체가 자기 죽음을 충분히 인지한 채 자신을 죽이는 데 동의한 경우라면 허용된다.” 하지만 낙태에 대해서는 결론을 유보한다. 태아를 살해하는 행위인 낙태는 미래의 삶을 박탈함으로써 해악을 끼치는 행위이자 태아는 자신의 죽음을 동의할 수 없기 때문에 허용돼서는 안 된다는 철학적 논증이 가능하다. 그렇더라도 관점에 따라서 태아가 생명체인지 아닌지에 대한 다툼은 해결되기가 힘들다. 저자는 낙태에 대해 “철학으로 풀기 어려운 유일한 죽음 문제”라며 열린 결말로 남겨둔다.
저자는 죽음을 철학하고 있지만 결국 우리에게 삶을 철학하도록 만든다. 책은 “한 시간 뒤 여러분이 세상에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죽음을 염두에 둔다면 매 순간의 삶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살아서 누리게 될 좋을 것들을 박탈하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 대부분에게 ‘나쁜 것’이다. 충실한 삶을 살수록 죽음은 ‘더 나쁜 것’이 된다. 죽음의 역설이다.
⊙ 세·줄·평 ★ ★ ★
·죽음을 철학한다는 것은 삶을 철학하는 것이다
·자살과 안락사의 옹호는 엄밀히 따져야 한다
·워낙 논리적인 글이라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죽음을 철학한다는 것은 삶을 철학하는 것이다
·자살과 안락사의 옹호는 엄밀히 따져야 한다
·워낙 논리적인 글이라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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