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우라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동아마라톤이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선수들을 초청해 국제 대회로 거듭났다. 국내 최초로 마스터스 부문이 신설되어 일반인들도 하프 코스에 참가할 수 있게 문호를 넓혔다. 나를 포함한 174명이 참가한 이 대회 마스터스 부문이 나의 마라톤 대회 공식 데뷔전이었다.
대회는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열렸다. 순위도 기록 측정도 없었지만 완주 메달을 목에 걸던 순간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얼마나 더 빨리, 오래 달릴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풀코스를 향한 꿈이 싹텄다.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마라톤을 배울 기회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경험과 인내만으로 달려야 했다.
이듬해 춘천마라톤이 일반인에게 풀코스를 개방했다. ‘쓰러져도 완주하겠다’는 각오로 출발선에 섰다. 가을 의암호는 단풍으로 불타고 있었다. 뛰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은 춘천마라톤의 매력이다. 그런데 달리다 보면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초반 5㎞ 오르막은 견딜 만했으나 이어지는 언덕길은 뼈가 으스러지는 듯했다. 그럼에도 두 해 동안 쌓아온 훈련이 나를 지탱했다. 첫 풀코스 완주 기록은 2시간 39분 05초. 욕심 없이 뛰었는데 결승선을 일반인 참가자 중 3위로 통과했다.
나는 호흡기 질환자였고 장거리 달리기에 소질이 있는지도 몰랐다. 풀코스를 완주했다고 해서 눈에 보이게 뭐가 달라지지도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지만 세상의 어떤 고난과 역경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시절 마라톤 풀코스 대회 중 일반인이 참가할 수 있는 대회는 동아마라톤과 춘천마라톤 두 곳뿐이었다. 더 큰 무대를 원하던 나는 전국체전 마라톤에 도전했다. 도민체전 장거리 달리기에선 실업 선수들과 격차를 절감했었지만, 마라톤이 있는 전국체전에선 2시간 35분 안에만 들어오면 도에 점수를 보탤 수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다”며 감독을 설득해 결국 경남 대표 선수로 선발됐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1997년 창원 대회는 찜통더위에 무너졌고 1998년 제주 대회는 폭풍우가 쓸고 갔다. 세찬 비바람 속에서는 잘 달리는 선수 뒤에 붙어야 했는데 괜한 욕심으로 앞서 나섰다가 끝내 주저앉았다. 어렵게 얻은 두 번의 기회를 놓치자 다시는 전국체전 무대에 서겠다는 말을 더 이상 꺼낼 수 없어서 이후로는 참가하지 않았다.
큰 대회는 망쳤지만 많은 자극이 됐다. 나의 현주소는 한국의 실업 무대도 넘지 못하던 병아리 수준이었지만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어느 정도 달리기를 하게 되면서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것을 꿈꾸고 기도하게 됐다. 연약한 자를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뤄주셨다.
그즈음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잘나가던 한국 경제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쳤다. 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지며 거리마다 실업자들의 발걸음이 무겁게 흩어졌다. 내가 다니던 대우그룹도 공중분해 됐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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