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중세시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유튜브에 ‘지구평면설’을 검색하면 적잖이 나온다. 재미없는 농담을 늘어놓는 영상들로 치부하면 안 된다. 이들은 사뭇 진지하다. 인공위성에서 보내온 둥근 지구의 사진을 보여줘도 단호하다.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며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는 데 공을 들인다. ‘평평한 지구 국제학회’도 존재한다.
공신력 있는 매체의 조사 결과도 있다. 미국의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2018년 미국인 약 650만명이 지구평면설을 믿는다고 추산했다. 지구를 그려보라고 하면 납작하고 평평한 원반 모양으로 그리는 이들이 최소 수백만명에 이른다고 짐작할 만하다.
보고 있자니 답답한 마음이 들 수 있다. 그들을 안쓰럽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구의 모양에 대한 과학적 사실을 전면으로 거부한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해를 끼치는 건 아니므로 크게 우려할 건 없다. 위험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긴 하다. 마이크 휴스라는 지구평면론자는 2020년 2월 손수 만든 로켓을 타고 평평한 지구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려다가 그만 목숨을 잃었다. 안타까운 사연이지만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온 삶에 대해 제3자들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잘못된 과학적 신념이 늘 무해한 건 아니다. 인류사에서 과학적 사실을 배척해 사회적으로 해악을 끼친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2020년대에도 그 명맥은 이어지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과학적 사실을 내팽개치며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연단에 선 트럼프 대통령은 몹시도 신랄하게 “기후변화는 전 세계에 저질러진 최대의 사기극”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기후위기를 전면 부인해 왔던 터라 새로운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보편적 가치 수호’를 다루는 유엔총회에서까지 이렇게 말하다니 당혹스러운 행보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렇듯 트럼프 대통령도 몹시 진지하다. 굳건한 신념이 느껴진다. “녹색 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여러분의 나라는 실패할 것”이라는 발언을 곱씹어 보면 그저 정치적 레토릭을 펼쳐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진심이라고 해서 진실이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193개 유엔 회원국을 향해 트럼프 대통령이 던진 거침없는 충고는 어떤 문제를 일으킬까. 기후변화로 인해 인류가 당면한 위기를 전면 부인함으로써 미국의 친환경 정책을 폐기시키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미국과 유럽이 주도해 온 전기차로의 전환은 이미 급감속 중이다. 미국 정부는 전기차에 지원하던 보조금을 없앴다. 전기차를 사야 할 이유 중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조건이 사라지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가진 또 다른 문제점은 그의 말을 ‘믿고 싶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미국의 법학자 타마르 프랭클 보스턴대 교수는 폰지 사기에 대한 저서에서 “스스로 믿으면 남들도 믿게 된다”라고 적었다. 그의 믿음은 이미 일부 지지를 받고 있고,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물론 공공연하게 그의 발언에 동의하는 건 여간해선 쉽지 않다. 그러나 명분으로 삼기에는 유용하다. 미국에서 전기차를 판매해 온 유럽, 한국, 일본의 자동차 기업들은 미국 정부의 기조를 이유로 경영 전략을 바꿀 수 있게 됐다. 유럽에서는 이미 전동화 계획을 수정 중이다. 보편적 가치였던 ‘탈탄소’는 글로벌 기업의 동참에 힘입어 이렇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문수정 산업2부장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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