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 혁명’의 증거를 원한다면 다른 곳을 볼 필요가 없다. 이전 통치자들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지금은 종이라고 표현한다.”
영국성공회 목회자이자 ‘기독교, 우리가 숨 쉬는 공기’(IVP) 저자인 글렌 스크리브너가 기독교의 대표 가치 중 하나인 ‘긍휼’이 어떻게 현대 사회에 정착했는지를 설명하며 든 사례다. 다수의 영미권 국가에서 장관으로 해석하는 단어 ‘미니스터’는 라틴어로 본래 하인이나 수행원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수상을 뜻하는 ‘프라임 미니스터’는 ‘가장 앞장서서 국민을 섬기는 사람’이다.
기독교적 가치가 처음부터 환영받던 건 아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초기 기독교인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반역적 집단이었다. 2세기 기독교 변증서 ‘옥타비우스’엔 초기 기독교인을 향한 로마 시민의 불만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우리네 연극을 관람하지 않고 공적 연회도 참석하지 않으며 신성한 경기를 혐오한다.” 여기서 신성한 경기는 검투사 경기를 뜻한다.
이런 것보다 로마인에게 더 생경했던 건 초기 기독교인이 실천한 ‘희생적인 사랑’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검투사 경기 놀잇감으로 전락시킨 제국의 폭거에 사랑으로 맞섰다. 3세기 수도사 텔레마쿠스는 검투사 경기 폐지를 호소하다 군중이 던진 돌에 맞아 순교했다. 이는 401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검투사 경기를 폐지하는 계기가 됐다.
당대 일반적인 관행이던 영아 살해와 전염병 환자 유기에도 반대했다. 대가 없이 이들을 돕기 위해 초기 기독교인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고아원과 병원을 세웠다. 당시로선 파격이던 이들의 행동 양식은 로마 제국의 기독교 공인 이후 법제화되며 일반의 상식이 된다. 서구를 비롯한 근현대 문명 밑바탕에 기독교적 가치가 녹아든 배경이다.
긍휼과 자비, 폭력에 맞서는 희생적 사랑…. 공기처럼 여겨지던 이들 가치가 요즘 세계 각국서 점차 희박해지는 듯하다. 정치적 폭력에 스러진 이를 애도하며 힘겹게 그리스도의 용서를 말하는 유족 앞에서 복수와 응징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진다. 신앙 공동체를 표방하는 교회에서도 관점이 다른 이를 매도하는 경우가 흔해졌다. 미국 월간지 디애틀랜틱 기자가 정치와 신앙을 결합한 기독교 민족주의를 추적한 책 ‘나라 권력 영광’(비아토르)에는 목회자가 예배 중 정치적 발언을 일삼으며 특정 후보와 정당을 힐난·지지하는 몇몇 교회 사례가 등장한다. 우리 역시 남의 나라 얘기라고 치부할 수 없는 분위기다.
최근 ‘폭력이 분위기일 때’란 칼럼을 쓴 복음주의 매체 크리스채너티투데이 편집장 러셀 무어는 미국서 연달아 발생한 살해 사건을 언급하며 “정치적 폭력은 악마적 행위”라고 지적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증오는 증오로, 보복은 더 큰 보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란 질문을 ‘무엇을 원하고 누구를 지지하는가’란 질문으로 치환하면 폭력은 불가피한 수단이 된다”고 우려했다.
예수는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걸 단호히 반대했다. 대제사장의 무장 세력에 칼을 휘두른 베드로에게 예수는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고 꾸짖었다. 사도 바울 역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며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7, 21)고 했다.
분노와 갈등의 대응책은 앙갚음이 아닌 대화와 설득이어야 한다. 그래야 용서와 화해란 값진 미덕이 우리 사회에서 계속 선순환할 수 있다. 미국이든 국내든 현대 사회의 기본값인 기독교적 미덕을 되찾는 데 기독교인이 앞장서길 바라는 마음이다. 복음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양민경 미션탐사부 차장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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