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인 27일 오전 직장인 이승준(28)씨는 서울 서대문구의 달동네 개미마을에서 난생처음 연탄 지게를 멨다. 어깨를 파고드는 30여㎏의 무게와 가파른 언덕길. 강남의 사무실로 향하던 그의 평소 출근길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TV 드라마에서나 보던 검은 연탄을 실제로 만져보는 것도 이날이 처음이었다. 그는 원하던 직장을 얻은 뒤 찾아온 공허함에 대한 답을 찾고자 스스로 이곳을 찾았다. 이씨는 “한 어르신이 제 손을 잡으며 ‘고맙다’며 물을 주려고 하실 때가 기억에 남는다”며 “연탄 한 장 한 장이 그분에게는 하루를 버티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밥상공동체 연탄은행의 올해 ‘기후환경 취약계층을 위한 사랑의 연탄 500만장 나누기’ 캠페인의 시작을 알리는 재개식이었다. 22년째 이어진 ‘따뜻한 대한민국 만들기’ 현장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기업 조끼를 입은 직장인, 주말을 반납한 청년 등 130여명의 봉사자들이 검댕 묻은 장갑을 끼고 길게 늘어섰다. “자, 갑니다. 조심!” 구호와 함께 3.65㎏의 연탄이 손을 거쳐 마음으로 옮겨갔다.
가파른 비탈과 좁은 골목 탓에 도시가스 배관조차 들어오지 않는 마을. 이곳 주민들에게 연탄은 유일한 겨울나기 수단이다. “아이고, 목사님 오셨네.” 연탄 나눔이 한창인 골목길, 밥상공동체 연탄은행 대표인 허기복 목사가 김계연(72) 어르신의 낡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캠페인을 다시 시작하며 겨우내 연탄으로 추위를 나야 할 주민들께 직접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얼룩덜룩한 단열재를 덧댄 천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방 안은 연탄아궁이로만 온기를 채우고 있었고, 비싼 기름보일러는 씻을 물을 데울 때만 잠깐 켜는 게 전부였다. 허 목사의 손을 맞잡은 김씨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걱정이 교차했다. “올겨울은 또 어찌 나나 걱정이지. 하루에 연탄을 여덟 장은 때야 혀.” 김씨는 낡은 연탄보일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겨울을 나려면 연탄 2000장이 넘게 필요하다고 한다. 그는 “기름값은 한 달에 40만원씩 드는데 어떻게 감당해. 연탄은행에서 주는 거 아니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겨울에 얼어 죽는다. 이거 없으면 못 산다”라며 허 목사의 손을 다시 한번 꽉 잡았다.
연탄은행의 ‘전국 연탄사용가구 조사’에 따르면 연탄 사용 가구는 2년 전보다 19% 줄어든 5만9000여 가구로 집계됐다. 하지만 연탄은행은 후원 목표를 오히려 지난해 300만장에서 올해 500만장으로 올렸다. 연탄으로 겨울을 나는 어르신들의 겨울나기가 여러모로 더욱 팍팍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서울의 마지막 연탄공장이 문을 닫는 등 공급망이 무너지면서 연탄값은 계속 오르고 있다. 특히 개미마을처럼 가파른 고지대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그 부담이 가중된다. 공장에서 1000원인 연탄 한장이, 배달비가 더해지면 최고 1500원까지 치솟는다. 해마다 거세지는 한파의 위협도 크다. 허 대표는 “폭설이라도 내리면 봉사자들의 발길이 끊기고 어르신들은 고립된다”며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연탄 소비는 더 늘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절실함에 화답하듯 현장에서는 온정의 손길이 이어졌다. 연탄은행 이사인 기동호 코리아에셋투자증권 대표는 당초 약속했던 4만장의 연탄을 현장에서 6만장으로 늘려 기부했다. 허 대표는 “연탄 사용 가구가 줄어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면서도 “하지만 공장이 사라지고 지원이 줄면서, 마지막 남은 분들의 겨울은 오히려 더 힘겨워졌다. 작년 300만장으로는 부족했기에, 그분들만큼은 제대로 지켜드리자는 절실함으로 목표를 올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배우 정애리 홍보대사도 2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씨는 한 어르신이 밤새 주전자를 끓여 끌어안고 추위를 버텼다는 사연을 접한 직후 연탄 봉사를 시작했다. 그는 “나의 활동을 알려 더 많은 사람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 감당해야 할 ‘또 다른 사랑의 수고’”라며 현장을 지키는 이유를 밝혔다. 그의 헌신은 몸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날도 자신이 운영하는 사단법인 ‘더 투게더’를 통해 연탄 3000장을 후원하며 온정을 보탰다.
글·사진=김용현 기자 fa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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