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사기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전세 사기 배드뱅크’ 설립 논의가 속도를 내고 있다. 국정기획위원회가 전세 사기 배드뱅크 설립을 국정 과제로 선정해 금융 당국에 구체화를 주문하면서다. 전세 사기 피해자가 3만명을 넘는 만큼 배드뱅크 규모도 클 것으로 예상되는데 금융권은 ‘장기 연체 채권 배드뱅크’ 출연에 이어 또다시 재원 조달 부담을 떠안게 될까 좌불안석이다.
4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이날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와 금융감독원, 금융업권별 협회, KB·신한·하나·우리·NH농협 5대 은행을 불러 전세 사기 배드뱅크 설립을 위한 간담회를 개최했다. 전세 사기 피해 주택에 설정된 근저당 채권 구조를 살펴보고 배드뱅크를 어떻게 설립해 운영할지, 금융권은 어떤 역할을 맡을지 의견을 듣기 위해 마련됐다.
전세 사기 배드뱅크가 금융사로부터 피해 주택 채권을 얼마나 넘겨받을 수 있는지 따져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앞서 금융위는 국토교통부 등과 전세 사기 피해 주택에 대해 각 금융사가 보유한 채권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사전 조사에 착수했다.
이날 간담회에서 논의된 내용은 오는 20일 더불어민주당 전세사기근절특별위원회 회의를 거쳐 구체화할 예정이다. 현재 전세 사기 피해자 지원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협의를 통해 피해자의 전세 보증금 등 채권을 개별적으로 매입하거나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피해자의 경·공매를 돕는 형태로 이뤄진다. 금융 당국은 전세 사기 피해자 지원 전면에 배드뱅크가 나서면 명도 소송 등 위험을 낮춰 피해자의 주거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보증금 회수 비율도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관건은 전세 사기 배드뱅크 출범 후 각 금융사로부터 채권을 가져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지와 이를 어떻게 조달할지다. 민주당은 전세 사기 배드뱅크의 총사업 규모를 1조원 규모로 추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세 사기 피해자의 채권액(전세 보증금 등)에 특정 매입가 할인율을 일괄 적용해 산출한 금액이다.
다만 이날 간담회에선 전세 사기 배드뱅크 규모와 재원 조달 방식은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위 관계자는 “오늘 간담회에서는 전세 사기 배드뱅크 설립을 위한 초기 수준의 논의가 이뤄졌다”며 “규모나 재원 조달 방안 등에 대해서는 아직 정해진 바 없다”고 말했다.
금융 당국은 장기 연체 채권 배드뱅크의 자본금 4000억원을 출연하는 데 금융권이 협조하기로 한 만큼 캠코와 LH의 재원을 우선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규모가 커질 경우 이번에도 금융권이 동원될 가능성은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장기 연체 채권 배드뱅크야 사실상 ‘회수 불가능’ 판정을 내린 채권을 넘기는 셈이니 피해가 크지 않다고 쳐도 전세 사기 배드뱅크에 파는 채권은 경매나 채권 추심업체를 통해 회수할 수 있다”면서 “전세 사기 배드뱅크의 재원 마련에도 금융권이 동원된다면 출자 때 한 번, 채권을 넘길 때 두 번 피해를 보는 셈”이라고 말했다.
김진욱 기자 realit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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