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연의 K컬처] 외모, 학벌… “연줄보다 인맥”

‘키 큰 사람이 싱겁다’는 말이 있다. 어원이나 그 해석에 대해 나름의 설(說)이 있겠으되, 대략 허우대 멀쩡한 이들이 기대한 것에 비해 재미가 없거나 친화력이 떨어짐을 의미한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 연예인을 살펴보면 이 말이 꼭 틀린 말은 아닌 듯 보인다. 수려한 외모에 훤칠한 이들이 연예 프로그램에 나와 시청자들에게 큰 재미를 주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가 배를 잡고 웃게 하는 이들은 키나 생김새에 콤플렉스가 있는 경우가 적잖다. 배우, 가수, 개그맨 등 이러한 경향은 직종과 관계없이 대체로 유사하게 나타난다. 잠시 읽기를 멈추고 기억나는 연예인들을 떠올려 보시라.

왜 그럴까. 달리 특별한 동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키 크고 잘생긴 이들은 상대방의 호감을 얻기 위해 굳이 말을 보태거나 잔재주를 부려야 할 필요가 없다. 상대의 표정과 반응으로 이미 그들의 매력이 전달되었음을 확인하고 나면 자신의 외모에 대한 칭찬에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정도로 겸손을 떨기만 하면 된다. 이후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잘생긴 자’의 호감을 얻어야 하는 상대방. ‘잘생긴 자’의 건조함을 무관심이나 무례함으로 받아들이지만 않는다면 대화는 계속된다. 이미 자신을 매력적으로 바라보는 상대로부터 환심(歡心)을 사려 노력할 이유를 찾기 어려우며, 이러한 만남이 반복되면서 ‘잘생긴 자’의 말수는 자연 줄어들 수밖에 없다. 수려한 외모 때문에 오히려 재치와 말솜씨를 잃게 되는 구조다. 말이 좋아 신언서판(身言書判)이지, 이상하리만큼 외모를 중요시하는 한국문화에서 이러한 현상은 특히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키 큰 사람이 싱겁다’라는 말을 한자로 풀이하면, ‘신(身)의 조건을 충족시킨 자 언(言)을 잃더라’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학벌 위주의 한국 교육 시스템이 이와 다르지 않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명문대학을 졸업한 이들은, 그것이 두뇌든 성실성이든,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와 존재감을 추가로 증명해야 하는 부담에서 해방된다. 입학한 학교와 전공이 인생의 업적이 되는 한국 사회에서 ‘학벌(學閥)’이란 평가 항목에 체크마크를 받은, 혹은 받았다 믿는 이들에게 자신을 더 갈고 닦아야 할 동기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좋은 대학을 졸업한 것만으로 원하는 직업을 갖기 어려운 요즘 젊은 세대들이야 스팩쌓기를 위해 대학 입학과 동시에 자기계발에 들어가지만, 세계 경제가 활황을 거듭하던 8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이들 중에는 여전히 잘난 대학 졸업장 하나로 오랜 세월 커리어를 이어가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중고등 교육과정에서 대폭 상승했다가 대학 입학 후 최저치로 떨어지는 사교육비 지출 추세는 대학교 학벌이 여전히 한국에서 개인을 평가하는데 주요한 기준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중고등학교에서의 사교육비 규모가 대학교까지 유지되는 미국과 비교해 보면, 그들이 대학에 부여하는 의미와 우리의 그것 사이에 큰 이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입학 연도를 기준으로, 그들은 졸업 연도를 기준으로 학번을 부여한다. 언제 입학을 했는지, 어느 학교에 다니다 편입을 했는지 굳이 따지지 않는다. 재수도 극히 드물다. 한국에서는 대학 입학을, 미국에서는 대학 졸업을 위해 투여된 땀과 시간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뜻이다.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수고로 입증해 낸 개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야 어느 문화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검증의 시기가 한국에서는 잔인하리만치 일찍 찾아오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이겨낸 이들에게 검증마크를 부여하는 시기 역시 너무 이른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19세에 이뤄낸 대학 입학이 인생의 위업이 되는 한국이다. 재수와 삼수, 백억 대 연봉의 스타강사와 등골 파괴의 주범 사교육비, 공교육 무용론과 위기에선 교권, 십대 자살률 세계 1위. 과연 우리가 바라던 것일까.

학벌이 인물 평가의 잣대가 된 한국이 낳은 것은 무엇일까. 뛰어난 브레인을 가진 인재 혹은 무거운 엉덩이들을 선별하는 절차로 보았을 때 물론 순기능도 있다. 그럼에도 학벌에 대한 한국 사회의 집착은 연(緣)줄에의 그것과 큰 상관관계에 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어느 대학을 졸업(아니 입학)했느냐에 따라 입신을 위해 가동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질과 크기가 달라진다. 처음 만나는 관계에서도 동문 선후배라는 작은 인연 하나가 둘을 강하게 묶어준다. 상대방에 대한 직접적 경험이 없더라도 같은 레이블을 공유하고 있음을 근거로 곧 서로를 끌고 당기기 시작한다. 사실상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직장의 규모와 오를 수 있는 직급의 수준이 대충 정해지는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경제적 여건만 허락한다면 몇 년이 더 걸리더라도 이너써클(inner circle) 가장자리에라도 들어가야 이후 인생의 난이도가 조금 쉬워진다.

가끔 이 연줄이라는 것이 인맥(人脈)과 혼동돼 함께 쓰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둘은 질적으로 다르다. 인맥은 내가 누구를 알고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배경이나 학벌이 아닌 상대방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에 근거해 평가하는 관점이다. 그 사람이 어느 대학에 다녔든 함께 일해보니 성실했다거나, 마음이 잘 맞았다던가, 문제해결 능력이 뛰어났다면 그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긍정적 인상을 남긴 이들은 곧 입소문(주로 추천서의 형태로)을 타고 같은 생각, 같은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소개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며 학벌이 아닌 관점과 관심의 유사성이 높은 이들 사이에 네트워크가 자연스럽게 구축된다. 동문(同門)이라는 레이블로 구성된 획일적 인간관계와 본질적으로 다른 구조다.

물론 두 종류의 네트워크 사이에 교집합도 존재한다. 연줄이 인맥으로, 인맥이 연줄로 발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둘은 지향점이 다르다. 연줄은 결과지만 인맥은 과정이다. 연줄은 과거요 인맥은 현재다. 연줄에 일단 올라타고 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함께 연줄에 오른 이들과 같은 높이의 인생 허들을 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존재감은 어느 정도 증명된다. 물론 어렵사리 명문대학에 입학한 이들이 이후 더 진지한 태도로 삶에 임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출신학교를 밝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그래야 할 동기를 누른다. 졸업 후 무엇을 하든 그들의 인생살이는 출신학교 위주로 평가된다. 소수 명문대학교 출신의 경우, 택시를 몰든, 떡볶이집을 하든, 치킨을 튀기든, 그들의 인생경로는 항상 그 학교를 정점으로 평가되며, ‘도대체 왜’, ‘어떤 사연이 있길래’ 등과 같은 의아함을 자아낸다.

인맥의 관점에서 볼 때, 나에 대한 평가는 지금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이들과 교감하는 시간과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특히 연줄이 없거나 약하다면,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든, 관계 유지든, 혹은 일과 관련된 퍼포먼스이든, 전략적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일관되게 증명해야 한다. 지금의 인맥이 다음 인맥의 질과 자신의 위치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줄과 달리 인맥은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 ‘인맥관리’는 있어도 ‘연줄관리’는 없다. 연줄은 잡아 올라타는 것이지 관리의 대상이 아니다.

현실에서 인맥과 연줄은 대개 얽히게 마련이라 이를 딱 떼어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둘 중 어느 것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제도와 그 공간을 채우는 구성원들의 삶과 타인에 대한 태도는 달라진다. 외모지상주의가 잘생긴 이들로 하여 말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게 하는 것과 같이, 학벌위주의 한국 사회는 젊은이들로 하여 대학 입학을 인생의 목표이자 업적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인생의 1/4 지점도 채 안 되는 지점에서 쟁취한 승리가 그들을 오히려 나태의 길로 밀어 넣을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얻은 것은 말 못 하는 미인과 공부하지 않는 대졸자다. 과정에 충실한 인재를 원한다면 한국은 연줄의 문화에서 인맥의 문화로 한 걸음 더 가야 한다.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겸 한국문화데이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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