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전우의 생일 축하합니다.” 지난 22일 경북 포항시 남구 양포교회에서 특별한 생일 파티가 열렸다. 주인공은 6·25 참전 에티오피아 용사 틸라운 테세마 가메(100). 에티오피아 전통의상을 곱게 차려입은 아내와 나란히 지팡이를 짚고 나와 생일케이크 앞에 앉은 노병은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렸다.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죽기 전에 한국 땅을 다시 밟게 돼 감사하다”며 “하나님이 사랑하는 한국에 더 큰 축복이 있기를, 전우들도 건강하길 기도한다”고 말했다.
틸라운의 생일파티는 올해 80주년을 맞은 양포교회(김진동 목사)와 계명대학교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또 다른 참전용사 벨라체우 아메네쉐(92)와 전사자 유가족 등과 함께다.
매년 6·25 참전용사를 초청해 감사와 존경을 전하는 행사를 해 온 김진동 목사는 “글 모르는 참전용사의 이야기를 대신 적어 국방부 공모에 응모했다가 그 수기가 책으로 출간된 일을 계기로 참전용사를 기억하고 예우할 책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며 “8년 전부터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도 초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에티오피아는 6·25전쟁 당시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지상군을 파병한 국가다. 당시 황실 근위병으로 구성된 ‘강뉴부대’는 1951년 7월 부산에 도착해 주요 전투에서 활약하며 253전 전승을 기록했다. 2년간 6037명을 파병해 123명이 전사하고 전쟁포로는 단 한 명도 생기지 않았던 정예부대였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생환해 본국으로 돌아간 그들을 기다린 것은 무관심과 고된 삶이었다.
에티오피아에 군부 쿠데타로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서면서 당시 한국을 위해 참전한 용사들은 동맹군과 싸운 배신자로 낙인찍혀 전 재산을 몰수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그런 이들을 잊지 않고 돌보는 손길의 중심엔 에티오피아 참전용사회 이사 하옥선(65) 권사가 있다. 이번 참전용사 가족들의 방한에도 함께한 그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30년째 참전용사와 아내, 후손들을 돌보고 있다. 1995년 직업군인인 남편을 따라 에티오피아에 발을 디뎠던 그는 1년 뒤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 후에도 두 딸과 함께 현지에 남았다. 참전용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인지 현지에서 만난 참전용사와 그 가족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였다. 그는 “1991년 공산 정권이 무너졌지만 가난은 후손들까지 이어졌다”고 안타까워했다. 6·25 참전용사들이 모여 사는 ‘코리아 사파르(한국촌)’의 현실은 비참했다. 에티오피아에서도 손꼽히는 빈곤 지역인 이곳에서 참전용사들은 흙집에 기대어 힘겹게 살아갔고 자녀들도 생계를 위해 학교가 아닌 거리로 내몰렸다.
“그들의 참전 대가는 명예가 아니라 가난과 외면이었어요. 그 고통은 세대에 걸쳐 이어졌죠. 이들에게 받은 은혜를 어떻게 갚을수 있을지 고민하다 공부방을 열고 교육과 직업훈련을 시작했어요. 그중엔 한국에서 연구원이 된 제자도 있고 국제변호사가 된 아이도 있습니다.”
하 권사는 참전용사들의 열악한 처지를 국내외에 알리며 지자체와 기업, NGO의 도움을 받아 의료 교육 주거 지원을 이어왔다.
“집을 수리해드린 지 사흘 만에 참전용사가 돌아가셨는데 ‘한국전쟁에 참전한 덕분에 내 자손들이 편히 살 수 있어 감사하다’는 마지막 말씀이 깊이 남았어요. 90세를 넘긴 이들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기에 한 분이라도 더 섬기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10년 전 남편과 이별하며 깊은 상실에 빠졌을 때도 하 권사를 지탱한 건 자신을 기다리는 이들의 존재였다. 다시 에티오피아로 돌아가 병든 노병들을 찾아가 돌봄을 시작했다. 4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져 한국으로 긴급 이송됐을 때도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6개월의 치료를 거치며 대부분의 기억을 잃었는데, 에티오피아로 돌아와 참전용사들을 마주하자 다시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하나님이 잠시 쉼을 주셨던 것 같아요. 지금은 현지 간사들과 함께 기쁘게 사역 중입니다.”
에티오피아 생존 참전용사는 이제 57명. 하 권사는 “마지막 한 분까지 그분의 손과 발이 돼 섬길 것”이라며 “후손들에게도 그들의 희생을 전하는 것이 제 사명이다. 잘 감당할 수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말했다.
포항=글·사진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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