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안전 자산으로 꼽히는 미국과 일본 국채 시장이 요동치면서 불안심리가 주식시장으로 전이되고 있다. 두 나라 정부가 추진하는 대규모 감세 정책이 재정 악화를 부를 것이라는 우려에 국채 가격이 떨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전문가들은 특히 미국의 재정 건전성 우려가 해소되지 않으면 당분간 자산시장 전반의 변동성이 더 커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22일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21일(이하 현지시간) 30년 만기 미 국채금리(수익률)는 전 거래일보다 0.12% 상승한 5.084%를 기록, 심리적 기준선인 5%를 다시 넘어섰다. 2023년 10월 이후 최고치다. 글로벌 채권금리의 벤치마크인 10년물 국채 수익률도 4.597%를 기록했다.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정책 불확실성으로 경제 위기 신호가 커졌을 때와 유사한 수준이다.
미 장기 국채금리 급등의 ‘트리거’가 된 것은 20년물 국채 입찰에서 확인된 수요 부진이다. 전날 실시된 160억 달러 규모 입찰에서 수익률이 5.10%로 지난달 4.81%보다 상승하면서 수요 부진이 부각됐다. 투자자들의 국채 매입 의지가 없어 정부가 더 높은 이자를 제시했다는 뜻이다.
지난 16일 신용평가사 무디스의 신용등급 강등으로 재정 건전성 우려가 커진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이 추진하는 대규모 감세안이 재정적자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관측이 국채 수요와 투자심리 위축으로 나타났다는 분석이다. 미 의회예산처(CBO)는 트럼프 감세안이 10년간 3조 달러(연간 GDP 1% 내외)의 재정적자를 더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재정적자 우려에 직면한 일본에서도 전날 30년물 국채 금리가 역대 최고치인 3.159%를 기록했다. 20년물 금리도 장중 2000년 10월 이후 가장 높은 2.575%까지 올랐다. 22일 오후 1시20분 기준으로도 30년물 금리는 전날보다 0.67% 오른 3.165%로 고공행진 중이다.
오는 7월로 예상되는 참의원(상원)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소비세 감세가 재정 악화 우려로 이어진 영향이다. 일본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현재 일본의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023년 기준 250%다. 그리스가 재정 위기에 직면했던 2009년(127%)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국채 입찰 수요도 낮았다. 일본 재무성이 실시한 1조엔 규모 20년 만기 국채 발행 입찰에서 시장 참가자들의 응찰률은 2.5배로, 2012년 8월(2.38배)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과거처럼 일본은행이 국채를 사주면 문제가 없겠지만 일본은행도 ‘자산 매입 축소’(테이퍼링)에 돌입, 지난해 8월부터 국채 매입 규모를 매 분기 4000억엔씩 줄이고 있다.
유럽에서도 경기 악화 우려로 인한 국채 투매세가 이어지고 있다. 영국에서는 30년물 국채 금리가 22일 오후 5시40분 기준 전 거래일보다 2.14% 급등한 5.632%를 기록하면서 1998년 이후 최고치를 보였다. 독일도 지난 3월 정부의 ‘돈 풀기’ 정책 여파로 국채 매도가 촉발돼 현재 30년물 금리가 3.17%를 넘어섰다.
국채금리 상승은 증시 하락으로 이어졌다. 장기 금리 상승으로 차입 비용이 커질 것을 우려한 투자자들이 증시에서 돈을 빼고 있기 때문이다. 21일 다우존스30 산업평균지수(-1.91%)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1.61%), 나스닥 종합지수(-1.41%)는 일제히 하락 마감했다.
한국 증시도 자산시장 투자심리 위축을 반영하면서 이날 2600선 아래로 무너졌다. 코스피는 외국인(5561억원)과 기관(4627억원) 투자자의 매도로 전 거래일보다 1.22% 내린 2593.67에 거래를 마쳤다. 중국이 화웨이의 최신형 인공지능(AI) 칩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미국의 규제를 따르는 해외 기업과 국가에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며 보복을 예고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이승훈 IBK투자증권 리서치본부장은 “트럼프 행정부의 감세안이나 관세 정책이 처음보다 완화되면서 재정 악화 우려가 수그러들어야 국채시장이 진정될 것으로 보인다”며 “또 다음 달 이후 물가지표가 시장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은현 기자 e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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