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고향 집은 예배당 터였다. 마당에는 감나무와 포도나무 등 각종 과실수에 작은 텃밭과 돼지우리도 있었다. 전기가 들어올 무렵 초가를 슬레이트로 바꿨다. 지붕 위에 올라 TV 안테나 방향을 맞추던 그 시절, 주일과 수요일 저녁이면 종소리 따라 신작로를 나서던 순간이 선명하다.
유쾌한 성격의 아버지는 비교적 일찍 장로가 됐다. 평생 주일학교 교사를 했기에 집에는 교회 청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경남노회 청년 100여쌍이 아버지 주선으로 화촉을 밝혔다. 산과 들, 바다가 어우러진 내 어린 날의 마을은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주일학교에서 찬송으로 부른 이 말씀은 한 점 의심 없는 현실이었다.
고등학교 진학 무렵 쓰러진 아버지는 수술 후 몇 해 고생하다 소천했다. 집안 살림이 기울자 가족의 일상은 무거워졌다. 형제 중 가장 느리고 우둔한 편이지만 기도와 생각이 늘면서 재수를 거쳐 대학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다. 돌이켜보면 연세 동산엔 참 큰 어른이 많았다. 김찬국 교수는 언제나 구약개론 수업에 앞서 시편 23편을 영문으로 암송하며 시작했다. 그렇게 한 학기 동안 내 입술에 붙은 말씀을 지금도 습관처럼 자주 읊조리곤 한다. 좌충우돌 꼬부랑길을 걸었던 청년의 때부터 직장생활,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아이 둘이 유년 시절을 보내는 동안 시편 기자의 고백은 내 젊은 날의 등불이고 기도며 소망이었다.
아버지가 쓰러진 연배에 암 수술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을 잃었다. 뒤이어 몇 해 만에 사업이 망하고 빚 독촉과 함께 수차례 재판정에도 섰다. 친구들이 직장과 사업에서 성취를 이룰 때 나는 삶에 찾아온 위기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가족은 물론 적잖은 친구들에게도 폐를 끼쳤다. 말 그대로 나는 속이는 자, 징계받은 죄인, 근심하는 빚쟁이가 됐다.
이런 내게 이 말씀이 언제 어떻게 찾아왔는지 잘 기억나진 않는다. 화살의 예리함도 아니고, 파도같이 전율하는 위력도 아닌 아침 이슬처럼 내 슬픈 아침에 잠잠히 내린 말씀이다. 신비고 은혜다. 어쩌다 강의도 하고 글도 쓰며 새로운 친구도 만난다. 여러 골목길을 걷고 꽃과 나무가 있는 낡은 집에서 선인의 역사와 신앙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늘어났다. 회갑이 넘은 나이, 아직 빚이 남은 가난한 사람이자 초보 학자로서 역량도 미약하다. 돈과 권력과 성취와는 거리가 먼 아무것도 아닌 자의 일상이나 분주함이나 초조함도 덜하다. 내일을 알 수 없지만 본문 말씀에 의지해 오늘 하루도 가벼운 순례의 걸음을 내디딘다.
<약력> △연세대 신학과 △명지대 여가학 석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 레저경영 박사 △한국기독교언론포럼 사무총장 △감리교신학대 객원교수 △생활여가연구소 및 크로스미디어랩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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