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민욱 작가(57·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2014년 광주비엔날레에서 한국전쟁기 학살됐던 민간인 희생자 유골이 담긴 컨테이너를 통째로 행사장으로 이동하는 용감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하지만 ‘좌파 이미지’가 씌워졌다. 그래서일까. 공교롭게도 미술관 개인전은 10년 만이라는 작가를 전시장인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최근 만났다.
1층에는 미지의 행성을 연상시키는 사막 같은 설치 작업이, 2층에는 일본의 민속놀이인 ‘불의 축제’(나라 도다이지 오미즈토리)와 ‘물의 축제’(도쿄의 후카가와 하치만 마츠리)를 담은 영상, 선풍기 날개가 대나무 끝에 달린 기이한 오브제, 머리가 11개 달린 사람이 등장하는 회화 등이 전시됐다. 그런가하면 3층에는 작가 작업실에서 가져온 수집품을 전시하고, 작업실을 바다처럼 형상화한 초현실적인 회화를 내놓았다. 도무지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이 다종한 장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관광객’이다. 뜬금없이 관광객이라니.
사연은 있다. 작가는 2023년 일본 오바야시재단이 수여하는 ‘리서치 그란트’ 수상자로 선정됐다. 7만 달러의 상금이 주어진 전시와 출판의 주제는 ‘도시의 비전’. 도쿄를 방문한 작가는 고민했다. 뭘 할 것인가. 작업의 관점을 찾는 게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기분”이었다고. 임민욱은 일본어에 미숙했다. 이내 연구자가 아닌 관광객이 된 기분에 젖게 됐다. 문득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광객의 관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예컨대 한국과 일본이 국가끼리 외교문제로 갈등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관광객은 이데올로기의 벽을 넘어 어디든 관광을 간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미술계가 다들 ‘생태, 생태’하는데, 우리가 언제 관광에 대해 숙고해본 적이 있나 싶었어요.”
관광객은 비유하자면 유동적인 존재다. 액체처럼 이념의 장벽을 뚫고 국가간 경계를 넘어간다. 그런 생각을 드러낸 퍼포먼스 영상 작품이 일본 도시를 한국 등 외국에서 온 관광객의 시선으로 포착한 ‘S.O.S-달려라 신신’이다. 유람선에 탄 관광객들은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도시를 명소를 보고 강변에서 벌어진 축제를 관람하기도 한다. 전시의 실마리를 푸는 열쇠 같은 이 영상 작품은 3층 전시장 안쪽에 있다.
관광객이 이처럼 한 시대의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유동적인 존재라면, 8세기경 일본으로 건너온 백제계, 신라계, 중국계 ‘도래인’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유동적인 존재를 상징한다. 작가는 도다이지(東大寺)의 유명한 의식인 오타이마츠를 리서치하며 도래인의 개념에 매력에 느꼈다. 임민욱의 작품 세계에서 관광객은 유동적인 존재로서의 마법적인 힘을 가졌기에 11개의 얼굴을 가진 십일면관음보살처럼 머리가 11개가 달려 있는 존재로 묘사되고, 풍년을 기원하며 마을 입구에 서 있던 솟대는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으로 변신한다.
이번 전시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회화다. 현대사를 주제로 대규모 설치와 영상 작업을 해온 터라 임민욱을 거론할 때 회화는 낯선 감이 있다. 하지만 그는 본디 파리 국립고등조형예술학과 회화과를 졸업한 회화 전공자다. 나이가 들어 고향을 향하는 마음이 일 듯 작가는 지난해 BB&M에서 가진 개인전에서부터 회화를 대거 선보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스케일이 한층 커졌다. 임민욱의 회화는 독특하다. 그는 회화를 붓으로 그리지 않는다. 찐득찐득한 에폭시 레진을 캔버스 틀에 부어 굳혀서 회화 같은 평면 효과를 낸다. 레진이 굳기 전에 집어넣은 갑오징어 뼈, 고사리, 테이프 등 일상의 물건이 캔버스에 화석처럼 섞여 있다. 작가는 이번엔 자신의 독산동 작업실을 스캔한 이미지를 바탕 삼아 물의 이미지와 중첩시켰다.
가장 스펙터클한 전시는 1층의 거대한 설치 작품이다. 미지의 행성을 상상하게 하는 작은 모래 구릉들이 무한히 뻗어있고, 표면에는 해독 불가능한 문자나 주술 같은 붉은 이미지가 찍혀 있다. 멀리 행성 너머로 두 개의 태양이 떠있다. 두 태양은 점점 거리가 가까워져 어느새 하나로 합쳐진다. 이 기이한 광경이 무얼 말하는지는 각자의 해석에 달려 있다. 2층과 3층 전시가 동시대를 변주한 현실적 공간이라면 1층은 이처럼 상상과 상징의 초현실적인 공간이다. 사막 같지만 부서지는 모래로 만든 것이 아니라 코르크 가루를 반죽해서 기본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황토가루를 뿌렸다. 울렁울렁거리는 땅 위 곳곳에는 둥근 부표가 바다 위 마냥 떠 있다. 전시장 전체에 액체가 흐르는 거 같다.
전시 제목은 옐로우를 초과한 상태를 뜻하는 ‘하이퍼 옐로우’이다. 옐로우는 동북아를 매개하는 황해의 ‘황’(누를 황)을 언뜻 떠올리게 하며, 국가 간 경계를 넘고 과거와 미래를 순환하는 유동적인 이미지를 상징한다. 작가는 이처럼 작품 전체에 유동성을 담아냄으로써 우리 시대에 필요한 정신은 어디든 유연하게 흘러들어가는 유동적 사고라고 말하는 거 같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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