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계의 판도를 바꿀 ‘게임체인저’로 유리기판이 급부상하고 있다. 유리기판은 플라스틱 같은 유기 소재 대신 유리 코어층을 채용한 기판이다. 기존 기판 대비 열 팽창률이 낮아 고열에서도 휨 현상이 드물고, 같은 면적에서 최대 10배 많은 전기적 신호 전달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유리기판은 고성능 반도체 칩의 고질적인 문제인 발열과 과도한 전력 소모라는 한계를 극복할 해결사로 꼽힌다.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 이후 새로운 반도체 패러다임을 준비하는 업계에서 경쟁적으로 유리기판 양산에 속도를 내고 있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계열사 삼성전기는 최근 세종 사업장에 유리기판 시범 생산 라인을 구축했다. 삼성전자는 올해 시제품을 출시해 고객사를 상대로 샘플 프로모션에 나설 계획이다. 최근 복수의 소재·부품·장비(소부장)사들과 실무 협의를 진행하며 구체적인 공급망 구축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삼성전기가 만든 유리기판으로 자사의 HBM까지 한꺼번에 패키징하는 서비스에 나설 것으로 예측된다.
SKC는 자회사 앱솔릭스를 통해 유리기판을 직접 생산할 계획이다. 앱솔릭스는 이미 미국 조지아주에 공장을 준공한 상태로 이르면 올해 말부터 양산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LG이노텍도 지난해 3월 미래 성장동력 확보 차원에서 유리기판 사업 착수를 공식화했고, 조만간 구미 사업장에서 시험 생산에 돌입할 예정이다.
글로벌업체들도 관심을 갖고 있다. 유리기판에 10년 넘게 투자해온 인텔은 지난 2023년 9월 미국 애리조나 공장에 10억 달러를 투자해 유리기판 연구·개발(R&D) 라인을 세웠다. AMD는 2028년 고성능컴퓨팅(HPC)용 반도체에 유리기판을 적용하겠다고 밝혔고, 내년 시범 생산 라인을 구축할 계획이다.
업계는 유리기판을 현존하는 반도체 기술의 한계를 모두 극복할 해결사로 꼽고 있다. 반도체 기판은 칩을 전기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데 최근 기판에 탑재되는 칩의 양이 크게 늘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플라스틱 기판은 칩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쉽게 휘는 문제가 있다. 데이터 처리량 증가로 칩의 발열이 심해지는 것도 휨 현상의 원인이 된다.
휨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칩과 기판을 이어주는 중간 다리 역할로 실리콘 소재의 ‘인터포저’를 끼우는데 유리기판을 도입하면 인터포저 없이 발열 현상을 해결할 수 있다. 또 인터포저가 없기 때문에 반도체 두께가 최대 4분의 1까지 얇아져 전기 신호 전달 속도 측면에서 효율적이고 전력 소비도 우수하다. 다만 유리로 제조되는 만큼 충격과 균열에 취약하고 유리로 기판을 만드는 싱귤레이션(Singulation, 절삭) 기술 확보가 필수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유리 소재와 관련된 기술의 신뢰성 문제를 해결하고 수율 검증만 완료하면 최소 1~2년 이내에 유리기판 상용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경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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