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연의 K컬처] 다양성 역동치는 사회 자살률 낮추는 지름길

드디어 조교수 1년 차. 미국에서 석사 2년, 박사 4년을 어렵사리 버텨내고 얻은 내 인생의 첫 직장이다. 조교 생활을 하며 그나마 학비 면제를 받기는 했지만, 매달 받아오는 월급은 처참한 수준이었기에 특히 더 뜻깊은 인생 이벤트였다. 힘들었던 시간을 함께 인내해 준 아내와 두 살 난 첫 딸아이에게, 내심 이제 되었다고, 행복하게 해 주겠다 다짐했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대학 동기들은 이미 대리를 달았거나 더 나은 직장으로 이직을 계획하던 인생 선배였지만, 막연하나마 곧 추월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취직 후 처음 몇 년 동안 꿈같은 나날이 펼쳐졌다. 차고와 화장실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은행의 소유이긴 했지만, 그 집 열쇠가 우리 손에 들어왔고, 그토록 그리던 미니밴도 하나 장만했다. 당시 새로 나온 모델이었는데 딸아이가 뒷좌석에서 디브이디를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장비가 설치되어 있어 먼 곳으로 여행하더라도 아이와 실랑이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연구와 강의에 들어가는 시간을 빼고는 가족과 오붓한 시간이 이어졌다. 드디어 인생의 봄날이 시작되는 듯했다.

행복이 자조(自嘲)로 바뀌는 데에는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독자는 한국인을 ‘비교의 민족’이라 탄식했던 필자의 글을 기억할 것이다. 나 역시 한국인. 노동청에 게시된 직업별 평균연봉 표를 죽 내려보며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듯, 할 말을 잊는다. 배관공과 전기기술자의 급여가 필자가 속해있는 사회과학 분야 대학교수의 그것보다 높았다. 간호사들도 우리보다 급여가 높았다. 물론 필자가 놀란 이유는 주로 한국에서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경험해 보지 못해 생긴 추상적인 편견 때문일 테지만, 미국의 급여체계가 여전히 한국과 다르다는 것은 직접 체험을 해보아서 잘 알고 있다.

몇 해 전, 우리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커플은 모두 면허를 가진 정식 간호사(registered nurse). 주거 면적이 워낙 넓기도 하고, 내부 전체가 이미 고급 자재로 업데이트되어 우리 동네에서 제법 고가(高價)에 나온 집이었지만, 이 젊은 부부는 곧 계약을 마쳤고, 틈날 때마다 집 외부 리모델링 공사가 이어졌다. 업자에 따라 요율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미국에서의 공사비용은 부르는 게 값이란 느낌이 들 정도다. 한국은 애교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코로나 전, 두 평이 채 되지 않는 우리 집 화장실을 개비(改備)하는 데에만 만 달러가 넘게 들었다. 이 이야기를 듣는 한국의 리모델링 업자들은 혀를 내두르며, 하나 같이 농담 반 진담 반, 미국으로의 이민을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겠다 말한다. 관찰력이 그리 좋지 않은 필자의 눈에도 옆집의 외관이 점차 변모하는 것이 뚜렷이 보였고, 거기서 그들의 소득 수준을 직감할 수 있었다. 참고로, 2023년 미국 노동부(Department of Labor) 통계자료에 의하면 이들의 대략적 연봉은 9만4480달러. 마취 전문 간호사의 경우 그 추정치는 이십만 달러를 웃돈다. 의사 부럽지 않다. 미국의 사회경제적 다양성과 그 스펙트럼의 크기에 다시 한번 겸손해지는 순간이다.

2023년 한국의 자살 사망률(연령표준화 인구 10만 명당)은 24.8명으로 전년 대비 8.5% 상승했다. 22년까지 하향세를 그리던 자살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OECD 평균(10.7명)은 물론, 한때 같은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일본(15.6명)을 크게 상회하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인다. 더 심각한 문제는 10대에서 30대까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사실. 40대의 경우 자살이 원인 2위이지만, 1위인 질병에 의한 사망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세계 최상의 의료보험 시스템에, 매년 받는 정기건강검진, 거기에 저렴한 의료비에 기인한 극심한 ‘건강염려증’까지… 삶에 대한 애착이 이렇게나 강한 한국이 자살률 OECD 1위를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이 역설을 떠나 이해하기 어렵다.

우울증이나 불안장애와 같은 정신건강 문제, 음주 혹은 약물 남용, 실업률, 빈곤율, 사회적 고립, 독거노인 비율, 금융 스트레스, 가족관계, 만성 신체질환, 계절적 요인, 사회 안전망과 의료서비스 접근성 등 자살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너무 다양해 어찌 보면 자살의 원인이 아닌 것이 없을 정도. 복지정책을 수립해야 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자연히 그 전선(前線)이 무한히 확대될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되면 예리한 대안 마련은 더 어려워진다. 한정된 시간과 인적자원을 어디에 집중할애해야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한국의 문화는 어떤가. 필자는 데이터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았다. 통계청(KOSIS)의 e-지방지표(2023년)에는 인구와 가족, 고용과 경제, 환경, 문화와 여가, 사회통합 등 다양한 테마들에 대한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지역별로 제공하는데, 나는 그중 자살률을 예측할 만한 변인들을 골라 하나하나 차트에 대입해 보았다. 청(廳)에서 전체 데이터를 별도로 제공하지 않아 며칠에 나눠 조금씩 수작업해야 했다. 인고의 시간 끝에 얻은 답은 19세 이상 인구의 ‘소비생활 만족도’. ‘먹고사는 것을 포함해 성인이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소비를 함에 있어 부족함이 없다고 느끼는 비율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 즉, 소비생활 만족도가 높은 동네일수록 자살률이 낮다는 이야기다.

‘삶의 만족도’나 ‘정신건강 증진기관 수’, ‘가족관계 만족도’, ‘실업률’ 등 더 그럴싸해 보이는 변인들도 이 자본주의 냄새 물씬 풍기는 인덱스 하나를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데이터를 더 들여다볼수록 ‘소비생활 만족도’는 단순히 ‘돈’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가족관계 만족도’와 큰 상관관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패턴을 조금 과장해서 설명하자면, ‘소비=가족=삶의 이유’ 정도가 될 것 같다. 한국인이 소비에서 경험하는 만족은 주로 가족의 기대를 충족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며, 이러한 만족감이 그들이 삶을 이어가는 이유라는, 너무도 애틋한 한국인의 정서를 이 차가운 데이터는 무심히 비치고 있다. 약 1년 전 필자가 퓨리서치의 결과를 인용하면서, 한국인이 물질적 풍요를 인생 최고의 가치로 꼽는 이유가 그들에게 ‘돈=가족=역할’이기 때문임을 적시한 바 있는데, 이러한 해석이 타당함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소비생활 만족도를 높이느냐다. 이번 칼럼을 준비하며 자살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참고 삼아 보았는데, 대부분 경제적 격차를 해소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맞는 말이다. 만족이라는 것은 단지 금전적 액수가 아니라 자신의 소비력에 대한 주관적 평가에 기인하고, 그 평가라는 것이 대체로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제안하는 정부의 시장개입에 기반한 인위적인 ‘키 맞추기’는 대안이 되기 어렵다. 국가가 쥐여준 돈으로 가족에 대한 경제적 책임을 다소 해소할 수는 있겠으나, 거기엔 자신의 땀과 노력이, ‘소비 만족감’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통합을 지향하는 한국에서는 지역과 연령대, 직군별로 대략적 통계를 작성할 뿐, 미국 노동부에서 출간하는 것과 유사한 직업별 임금 추산치를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전문가 블로거들이 정리해 공유한 자료의 상단에는 예외 없이 ‘사’ 자로 끝나는 직업 일색. 대부분 의료계와 법조계에서 활동하는 식자(識者) 층이다. 필자가 서두에 미국의 사례를 들어 거론했던 놀라움이나 깨달음의 순간은 여기에 없다. 그만큼 한국의 사회경제적 피라미드는 ‘먹물’을 정점으로 획일화되어 있다는 방증이다.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던 60~70년대. 우리 부모 세대는 자녀 교육에 목숨을 걸었다. 못 배운 설움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전력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것이 80년대 이후 한국이 해외에서도 ‘하이 브레인’으로 인정받으며 압축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제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조금 바뀌었다. 꼭 인서울 4년제 대학을 나오지 않더라도 부(富)를 누리며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문화의 대류가 이에 순응하는 데에는 시차가 발생하기 마련.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옳은 학벌’, ‘옳은 직장’, ‘옳은 삶의 경로’와 같은 시대착오적 환상이 강하게 남아있다. 이 ‘정해진’ 루트를 벗어난 이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 자신만이 걸어갈 수 있는, 더 나은 인생길에 대해서는 고민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타고난 능력과 적성에 맞는 직업을 택해 일로 매진한다면, 누구에게나 ‘만족스러운 소비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의 급여가 주어지는, 다양성이 역동치는 사회라야 낮은 자살률을 기대할 수 있다. 한국의 문화가 이리 변모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겸 한국문화데이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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