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대에 서는 기쁨이 있다. 누구나 무대 위에서 자기만의 공연을 꿈꾼다. 주목받고 박수갈채를 받는다는 것은 흥분된 일이다. 조명이 비치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을 때 긴장되는 순간이지만 행복한 일이다. 주목을 받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다. 누군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예술의 세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삶이 하나의 작품이라고 여긴다면 무대는 어디서나 펼쳐질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팔 물건을 만들어 내는 땀내 나는 작업장이 무대일 수 있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무대에 서서 신명 나는 한판 춤을 출 날을 기다린다. 존재감이란 누군가 나의 가치를 충분히 알아줄 때 느낀다. 누구나 무대에 서는 날이 온다. 싫든 좋든 자신의 삶을 드러내야 할 때가 온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평가받는 순간이 온다.
무대에 선다는 것은 자신을 노출하는 일이다. 자신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다. 조명이 비치면 무대는 몸동작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드러난다. 무대에 서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자신을 숨길 수 없다는 면에서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무대는 박수만 받는 곳이 아니다. 무대는 꽃바구니가 올려지기도 하지만 야유가 쏟아질 수도 있다. 냉엄한 평가를 받는 곳이다. 준비된 무대여야 한다. 갑자기 무대에 서면 창피를 당할 수 있다. 성급하게 오르다 보면 예상보다 빨리 막이 내려진다.
조기에 막을 내린 인생은 황량하다. 무대는 치열하고 냉엄한 곳이다. 날 선 평론과 비난의 칼에 온전히 살 자가 많지 않다. 극이 끝나기도 전에 청중이 떠나 버릴 수도 있다. 청중이 떠난 무대는 의미 없는 외로운 독주에 불과하다. 세상은 단막극으로 가득 차 있다. 2막을 열기도 전에 끝난 무대가 있다. 나에게만 조명을 비추는 무대는 로망이면서 고통일 수 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주목되는 무대 위 시간은 평범한 일상의 한 시간과 다르다. 웬만한 내공이 아니면 10분을 버텨내기도 어렵다. 계속 찬사가 터지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무명의 시절이 좋을 때일 수 있다. 역사의 무대에 오르기 전, 메인 그라운드에서 뛰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무대 뒤편에서 흘린 땀의 총량이 중요하다.
무대 위보다 무대 뒤가 훨씬 더 치열한 곳이다. 청중의 환호를 너무 성급하게 기대하면 안 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 시절을 원망하지 않아야 한다. 성급하게 자기를 드러내려는 허영심과 싸워야 한다. “나 누구인지 알아?” 천박한 갑의 행태가 사회 속에서 희화화될 때가 있다. 소아병적 미성숙함은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다. 알아주지 않아 속상한 것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은둔의 시간이 주는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구약의 모세는 성급하게 무대에 올랐다. 실패로 끝났다.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광야 40년, 혹독한 세월을 보낸 다음에 부르심을 받는다. 하나님은 숨어 있는 사람을 기어이 불러내신다. 누가 불러 주지 않는다고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온다. 준비된 자신을 보여줘야 한다. 준비된 사람이 오른 무대는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바라보는 사람들도 초조해하지 않고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굳이 박수를 강요하지 않아도 된다. 청중은 박수를 쳐야 할 때를 알고 있다. 공연이 끝났음에도 앙코르를 외치는 청중의 우레 같은 박수로 커튼을 내리지 못하는 무대는 아름답다.
지금도 수많은 무대가 열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한다. 무대 커튼 뒤에서 불러줄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경쟁자는 넘쳐난다. 정작 무대에 세우고 싶은 사람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무조건 무대에 오르면 안 된다. 준비된 무대여야 한다. 잘 준비된 무대는 멋있다. 삶의 모든 여정이 무대라고 한다면 소홀하게 대할 일상은 없다. 무대는 매일 열리고 닫히며 반복된다. 남이 주목해 주지 않아도 평범한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혼신을 다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무대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청중은 느긋하게 즐길 아름다운 무대를 목이 타게 기다린다.
(부산 수영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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