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하와이’로 불리는 일본 오키나와는 온화한 기후와 에메랄드빛 바다, 고즈넉한 유적지가 있어 사랑받는 여행지다. 하지만 오키나와는 원래 일본의 영토가 아니었다. 류큐 왕국으로 불리며 명나라와의 해상무역으로 번영을 이뤘지만 명나라의 배신과 일본의 침략,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정까지 거치며 많은 희생을 치렀다. 언어를 비롯한 문화를 말살당하고 지금도 여전히 일본에서 차별받는 아픈 역사를 가진 땅이다.
최근 방영된 tvN 예능 ‘벌거벗은 세계사’ 오키나와 편은 일제의 지배를 당했던 우리나라의 역사를 상기시키며 시청자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풍부한 영상·사진자료는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전했다. 박삼헌 건국대 일어교육과 교수의 강의, 나리카와 아야 전 아사히신문 기자와 여행작가 정꽃나래의 설명, 패널들의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대화가 이어졌다.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있는 김형오·이윤호 PD를 지난 12일 서울 마포구 CJ ENM 센터에서 만났다. 김 PD는 “역사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풀어가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은 작업”이라며 “만드는 우리도 어렵게 느끼는 내용이 많기 때문에 보다 많은 시청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을 찾으려 한다”고 밝혔다.
2020년 12월 처음 전파를 탄 ‘벌거벗은 세계사’는 햇수로 5년째 평일 저녁 주요 시간대를 지키며 역사 예능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김 PD는 “콘텐츠 경쟁이 치열한 요즘, 교양 예능 프로그램이 장수하기는 쉽지 않다”며 “시청률 압박을 받지 않는 PD가 어디 있겠느냐. 다행히 시청률이나 광고 수익 면에서 긍정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벌거벗은 세계사’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발이 묶인 시청자들이 안방에서 세계 여행을 하는 콘셉트로 기획됐다. 항공기 안에서 스토리텔링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셈이다.
김 PD는 “전작인 ‘뇌섹시대-문제적 남자’가 끝나고 만든 프로그램이다. 시대 상황에 맞춰 ‘온택트 히스토리 투어’ 느낌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라며 “해외를 직접 갈 수 없으니 예전에 여행지에 대한 향수를 느끼면서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고 추억을 꺼내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나라 땅을 밟을 순 없지만 영공을 한 바퀴 돌아보는 항공사 상품이 있어 거기서 콘셉트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공동연출을 맡은 이윤호 PD는 “긴 역사를 한정된 방송 시간 안에서 다루는 게 쉽지 않다”며 “한 인물이나 사건을 다룰 때는 짧은 시간 안에 풀어가기가 그나마 수월하지만 ‘도시의 탄생’ 같은 주제는 내용을 최대한 욱여넣으면서 재밌는 것을 추리기가 어렵다. 봐야 할 자료의 양도 엄청나다”고 말했다.
여러 시각이 존재하는 역사적 사건을 다룰 때는 제작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학계나 대중의 반응이 즉각적이기 때문이다. 김 PD는 “과거 역사 분야는 학교 등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하는 방식으로만 이뤄졌지만 요즘은 유튜브 등에서 비전문가가 만드는 콘텐츠도 있고, 누구나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논문이 한 사건에 대해서만 수십 편이고 새로운 학설도 계속해서 공개된다”며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미국 대선, 자이니치 등 현대사를 주제로 할 경우 다양한 해석이 있어 더욱 조심스레 다뤄야 하는 고충이 있다. 비주얼 작업이나 감수 작업도 만만치 않다”고 털어놨다.
교양이면서 예능이기도 한 프로그램의 성격 때문에 고민스런 지점도 있다. 역사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전문성, 진지함을 유지해야 하지만 재미가 없으면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는다. 프로그램의 분위기나 자막의 수위 등을 조절하는 게 관건이다.
김 PD는 “이제 예능과 교양의 경계가 허물어졌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둘 다 예능을 하던 PD들이라 정통 교양으로 안 가려고 처음부터 기획했다”면서도 “역사 얘기하는데 자막 가지고 ‘장난’칠 수가 없어서 패널들이 화제를 전환해 숨통을 틔우곤 한다. 오스만 제국이 주제라면 커피의 기원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는 식이다. 절제하고 선을 지키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이 PD는 “교수들과 작업하기 때문에 전문적이고 교육적인 ‘비주얼 세팅’이 이미 돼 있는 상태에서 친숙하고 재밌게 느껴지도록 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구성 면에서 중간중간 퀴즈나 흥미로운 자료들을 넣는다”며 “자막의 경우 한계는 있지만 ‘말랑말랑한’ 요소들을 넣어보려 노력한다”고 전했다.
프로그램이 처음부터 순탄하게 진행됐던 건 아니다. 완성도 면에 있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역사가 이렇게 민감하고, 즉각적인 반응이 오는 무서운 주제라는 걸 알게 됐다. ‘예능이라고 해서 재미 위주로만 가면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라는 걸 확실히 학습했다”며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참여하는 교수들과 소통에 더욱 신경 쓰고, 많은 분들과 협업하는 과정에서 서로 의견을 이해하고 조율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돌이켰다.
프로그램의 특성상 엄청난 양의 역사 공부는 제작진의 주요 업무 중 하나다. 이 PD는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서점에 가서 역사 관련 서적을 보다가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유튜브 등에서 역사 콘텐츠들을 훑어보기도 한다“며 “주로 공부를 하다보니 회의실 분위기도 마치 대학원 연구실 같다”고 전했다.
김 PD는 “몇 년 사이에 평생 읽을 책을 다 읽은 것 같고, 시력도 나빠진 것 같다. 회당 평균 50페이지 분량의 대본을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끼린 ‘이 정도 자료를 봤으면 학위도 땄겠다’는 농담을 할 정도”라고 했다.
만드는 과정은 고생스럽지만 시청자들의 반응, 그 중에서도 학부모들의 반응이 많아 보람을 느낄 때가 많다고 두 사람은 입을 모았다.
김 PD는 “예능에서 역사 전문가와 함께 검증된 사실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역사에 대해 정리하고 고민하고 이야기하는 이런 작업을 ‘공공역사’의 일부라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뿌듯하다”면서 “재미만 추구하는 프로그램은 아니다보니 트렌드에 따라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아서 더 가치있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이 PD는 “방송 내용을 유튜브에 계속 업로드하는데 조회 수가 꽤 많이 나오는 걸 보고 사람들이 이 콘텐츠를 유익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최근에도 미 대선 이후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을 다룬 회차의 조회수가 다시 올라갔다”며 “지식에 대한 대중의 욕구를 조금은 충족시키는 콘텐츠인 것 같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임세정 기자 @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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