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저장소]는 생의 마지막 순간, 다른 이에게 생명을 전하고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누군가에게 너무나 소중했을 그들의 삶을, 가족과 친구·지인들의 기억을 통해 기록하고 꼭꼭 담아 오래 보관하고자 합니다.

“선생님, 혹시 우리 아들 장기 기증은 가능한가요.”
혼수상태에 빠진 아들을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의사에게 아버지 이봉화(65)씨가 물었다. 아들이 누워있던 중환자실 TV에서 한 어린아이가 장기 기증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가 나왔던 게 떠올라 꺼낸 말이었다. “좋은 일 하시게요?”라는 의사의 질문에 봉화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봉화씨 아내 김애자(61)씨 마음은 한참이나 괴로웠다. 장기 기증 절차가 진행되려는 참에도 아들에게 못 할 짓 같다는 생각이 계속됐다. 살아있던 20년간 아파서 병원만 다닌 아들을 또 병원에 보내 칼을 대라니. 고민하는 애자씨를 결심하게 한 건 다름 아닌 아들이었다.
아들 응상이는 집에 놀러 온 손님을 단 한 번도 그냥 보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우측 편마비로 오른 다리를 끌고 다니느라 엉성해진 걸음걸이로도 냉장고까지 가 음료수를 꺼내줄 정도로 남에게 내어주는 걸 좋아했다. 사람 좋아하던 아들을 떠올리니 답이 나왔다. 생명을 나누자.
그렇게 응상씨는 2015년 2월 12일, 25살의 나이에 7명에게 새 생명을 선물하고 세상을 떠났다.

1990년 3월 12일,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서 2남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응상씨는 남들처럼 평범하고 건강했다. 아들만 둘인 집에서 애교가 많은 막내아들을 애자씨는 딸처럼 키웠다.
응상씨가 4살이던 1993년 6월, 일주일 넘게 이어진 감기가 열흘 가까이 떨어지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뇌수막염이라 했다. 이상하리만큼 병원이 붐볐고 응상씨는 자리가 없어 응급실로 입원했다. 그해 바이러스성 뇌수막염이 대규모 유행이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의사는 척추에서 물을 뽑아 염증 수치를 확인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소리까지 했다. 진짜 무서운 일은 아들이 척수를 뽑고 지쳐 누운 지 한 시간쯤 후 닥쳤다. 시간마다 “엄마 쉬 마려워” 소리를 하던 아들이 언젠가부터 아무 소리가 없었다. 납작했던 배에는 복수가 차 잔뜩 불러있었다. 제 발로 병원에 걸어 들어갔던 4살짜리 아들은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손발을 꼬집어도 미동이 없는 막내아들이 깨어나길 바라며 어린 아들이 곧잘 따라 부르던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카세트테이프를 반복 재생했다.
응상씨는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기적같이 번쩍 눈을 떴다. 그런데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우측 편마비와 언어장애. 평생 3~5세의 언어 수준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바이러스성 뇌수막염으로 인한 후유증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가수를 꿈꾸던 아들의 세계가 병원과 집으로 좁아졌다.

그렇지만 모든 게 멈춘 건 아니었다. 응상씨 부모님은 재활 치료를 위해 뭐든 했다. 아버지 봉화씨는 “누가 주사 잘 놓는다더라, 누가 침 잘 놓는다더라, 하는 데는 다 쫓아다녔다”고 말했다. 남들보다 늦었지만 학교도 들어갔다. 응상씨는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안에 있는 연세재활학교를 거쳐 11살이 된 2000년 3월, 그해 개교한 한국우진학교에 3학년으로 입학했다.
“마냥 착한 학생은 아니었죠”라며 웃은 공진하(52) 선생님은 응상씨의 첫 담임선생님이었다. 공 선생님에게도 응상씨는 우진학교에 부임해 맡은 첫 제자였다. 공 선생님은 그 시절 응상씨를 “개구쟁이에다 주눅 들지 않는 활발한 친구여서 좋았다”고 추억했다.
거동이 불편한데도 얼마나 쏘다녔는지 한쪽 마비로 까치발을 하고 다니는 오른 다리 신발 앞코가 닳아 한 달에 한 번은 구멍이 났다. 등굣길 마주치는 모든 선생님에게 빼먹지 않고 인사하는 친구였다. 그러느라 발이 꼬여 넘어지며 앞니 하나가 깨진 적도 있었지만 굴하지 않고 졸업할 때까지 누구보다 반갑게, 모든 선생님에게 팔을 흔들며 아는 척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교내 학예회에선 ‘아기돼지 삼형제’ 연극으로 놀라운 연기력을 각인시켰다. 늑대 역할을 맡은 그는 팔 한쪽을 접어 날갯짓하듯 펄럭거리며 체취로 아기 돼지들을 공격하는 연기를 했다. 대사 한 줄 없었지만 너무나 실감 나는 움직임이었다. 그날 연기를 본 모두 ‘응상이 늑대’를 잊지 못했다.
운동회 때는 워커(보행보조기)를 밀며 달리기경기에 출전했고, 방과 후에는 매일 한 시간씩 수영도 했다. 공 선생님은 “뇌수막염 후유증으로 투병 생활을 했지만, 그 자체가 비극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웅상이는 자기 모습 그대로 너무 즐겁고 유쾌하게 살았다”고 말했다.
불의의 사고가 닥친 건 응상씨 외할머니 구순을 축하하러 간 식사 자리에서였다. 그날 응상씨가 먹고 싶다며 손을 뻗었던 갈비 조각이 유독 커 보였다고, 애자씨는 기억했다. “여보, 갈비가 큰 것 같아”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들은 고기를 삼켰고, 순식간에 식사 자리는 아수라장이 됐다. 119 구급차가 응상씨를 실어 병원까지 가는 데 고작 17분이 걸렸다고 했다. 그 사이 아들의 몸은 이미 축 늘어져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이별은 그렇게 닥쳤다.
남은 이들은 응상씨 덕분에 얻은 게 많아 고맙다고 입을 모았다. 공 선생님은 “‘엄마 아빠만 손을 놓으면, 응상이는 바로 자립할 수 있다’고 했을 정도로 건강했던 제자였기에 충격이 더 컸다”고 전했다. 하지만 장기를 기증하고 떠난 제자는 선생님에게도 가르침을 줬다. 공 선생님은 “(장기기증) 덕분에 다들 응상이를 계속해서 기억해 주는 걸 보니 제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금쪽같던 아들을 보내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던 부모님도 “응상이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올해로 9년째 ‘생명의 소리’ 합창단 소속으로 공연을 하고 있다. 기증자 유가족들과 이식 수혜자로 구성된 합창단이다. 봉화씨는 “이식받은 사람들이 잘살고 있는 걸 눈으로 보면서 내 아들도 이분들처럼 잘살고 있겠지 하는 희망을 얻는다”고 말했다.
여전히 마음 한쪽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그래도 견디는 건 아들이 남긴 소망이 있어서다. 애자씨는 “이다음에 아들을 만나면 제일 먼저 미안하다고 하고 싶다. 미안하고, 엄마 자식으로 태어나줘서 너무 고맙다고”라면서 “아들에게 장기를 기증받은 일곱 분이 우리 아들 몫까지 건강하게 사셨으면 하는 게 또 하나의 바람이 됐다”며 울음을 삼켰다.
성윤수 기자 tigri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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