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는 같이 살고 싶지 않지만, 처벌은 원치 않아요.” A군(13)은 2년 전 그날의 일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남편과 이혼한 뒤 A군과 단둘이 살던 엄마는 2021년 12월 1억2000만원을 빌렸다. 지인에게 이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생활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빌려준 돈은 제때 이자가 입금되지 않았고, A군 엄마도 월 500만~600만원에 달하는 이자를 부담해야 했다.
이듬해 7월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엄마는 극단적 선택을 결심했다. 아이도 함께 데려가기로 했다. 하지만 자고 있던 A군이 엄마에게 저항하다 도망치며 범행은 미수에 그쳤다.
범행 이후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아이에게 “오늘 일은 엄마와 비밀로 하자”고 했다. 끔찍한 공포 속에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던 아이는 2개월간 별다른 보호 조치나 상담 치료 없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려 했던 엄마와 같은 공간에서 지내야 했다.
이후에도 엄마는 아이에게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엄마를 잃을 수 있다는 불안에 더해 자신에게 또다시 해를 가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결국 A군은 아빠에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고, 그런 후에야 엄마와 분리될 수 있었다. A군은 다시는 엄마와 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고심 끝에 엄마에 대한 선처를 원한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A군처럼 ‘살해 후 자살’ 범행의 피해 아동들은 부모에 대해 혼란스러운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살해 후 자살 사건의 경우 피해 아동의 위기 징후가 드러나지 않는 사례가 많다. 부모에 대한 공포감뿐 아니라 좋은 기억도 함께 지니고 있는 피해 아동은 부모와의 관계를 놓고도 고민이 클 수밖에 없다. 부모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서서히 커지는 경우가 많은 일반적인 아동학대와는 다른 양상이다.
국민일보가 오는 19일 ‘아동학대 예방의 날’을 앞두고 국제아동권리 비정부기구(NGO)인 세이브더칠드런과 2014~2023년 살해 후 자살 판결문 102건을 분석한 결과 생존 피해 아동(53건)의 32%(17건)는 부모를 여전히 신뢰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등 혼란스러운 감정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가 생존 피해 아동(53건)에게 가해 부모에 대한 의사를 확인한 경우는 20건에 불과했다. 국민일보 분석 결과 부모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거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한 경우는 14건으로 나타났다. 가해 부모와 같이 살고 싶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힌 경우는 7건(중복 의사 포함)이었다.
B군(13)은 소아 우울 증상이 나타나 엄마와 함께 치료프로그램과 가족 상담을 받았다. 홀로 두 형제를 키우는 엄마는 아이의 치료에도 적극적이었고, 평소 아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엄마는 2021년 친한 후배의 죽음을 계기로 술을 자주 마셨고, 그해 12월 아이들에게 “같이 죽자”며 살해 위협을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에도 B군과 동생은 “엄마와 예전처럼 살고 싶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부모와 다시 살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다고 해서 당시의 공포가 사라진 건 아니라는 게 전문가 분석이다.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특임이사는 10일 “생존 아동은 가해 부모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큰 위협을 가했던 트라우마로 인해 혼란스러움을 겪을 수 있다”며 “분노와 두려움, 사랑 등의 상반된 감정이 얽히게 되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자신을 해치려 했던 부모를 두려워하게 되고, 결국 떨어져 살기를 희망하는 경우도 있다. 2021년 제주에서 살던 C군(10)의 엄마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처지를 비관하다 C군을 살해하고, 자신도 세상을 떠나려 했다. 두 차례 범행이 이어졌지만 다행히 미수에 그쳤다. C군은 엄마에 대한 처벌은 원치 않는다고 했지만 같이 사는 것 또한 거부했다. 엄마의 지인을 마주치면 놀라서 피하거나 엄마와 다시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C군은 현재 엄마와 분리돼 할아버지와 살고 있다.
C군처럼 처벌을 원치 않지만, 부모와의 삶도 거부하는 사례가 4건이었다. 아동이 부모의 처벌을 원한다는 의사가 확인된 경우도 1건 있었다. 이런 사례는 살해 후 자살을 시도하려던 부모가 도구를 사용하는 등 피해 아동에게 큰 고통과 충격을 준 경우였다.
재판부가 피해 아동의 의사를 직접 확인하지 않은 사건의 경우 다른 성인 가족의 의사가 비중 있게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생존 피해 아동 사건 53건 가운데 피해 아동의 의사가 드러나지 않은 29건의 사건에서는 피해자 회복 정도와 남은 가족들의 선처 의사만 언급됐다. 피해 당사자인 아동의 의견이 반영되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사건 발생 후 수습 과정에서 피해 아동이 자칫 부모의 위협 행동이 자신 때문이라는 왜곡된 생각이나 죄책감에 빠질 수 있다며 보다 적극적인 피해 아동 지원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유나 이정헌 기자 spring@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