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가 장애 예술 현장을 찾아간다. 장애인들이 복지 지원 대상을 넘어 창작의 주체가 되어 예술인으로서의 꿈틀거리는 욕구를 실현할 수 있도록 장애 당사자와 함께 부모, 비장애 전문가, 정부, 기업 등 사회 각 주체가 어떤 활동을 벌이고 있는지 그 현주소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한국 장애예술의 지형도를 그리는 한편, 해결해야 할 미완의 과제는 무엇인지 점검한다.

지난 9월 9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베벌리힐스에 위치한 ‘월리스 아넨버그 퍼포밍아츠센터’를 찾았다. 로스앤젤레스 기반 비영리단체 미라클 프로젝트가 이곳에서 하는 온라인 수업 ‘익스프레스 유어셀프(Express yourself·너를 표현하라)’를 참관하기 위해서였다.
줌 수업이라 사무실에 혼자 나온 프로그램 디렉터 한나 워런이 반갑게 맞아줬다. 노트북 화면에는 미나 블룸(반주자 겸 작곡가), 셸리 팩(공연예술가) 등 2명의 강사와 닉·윌리엄·잭 등 6명의 학생이 각자의 집에서 수업에 참여 중이었다. 두 강사가 음악에 맞춰 몸을 가볍게 흔들며 뮤지컬 영화 ‘더티 댄싱’의 삽입곡 ‘두 유 러브 미(Do you love me?)’ 등을 선보였다. 뮤직비디오에 쓸 배경 음악을 고르는 중이었다.

기계 힘을 빌린 목소리
놀랍게도 줌 수업에 참여한 이들은 자폐 스펙트럼이 있으면서 실행증(ap raxia·행위상실증)으로 말을 하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보완대체의사소통(AAC·Alternative and Augmentative Communication) 기술 덕분에 이 수업을 통해 뮤직비디오 제작까지 가능했다. AAC는 태블릿에 글자를 타이핑하면 바로 목소리가 되어 나오는 기술이다. 장애 정도에 따라 부모나 도우미가 옆에서 타이핑을 해주기도 한다.
닉이 한국에서 온 기자에게 인사를 하려고 몸을 내밀었다. 순간 기계음이 나왔다.
“안녕, 내 이름은 닉입니다. 이건 대단한 수업이에요.”
이어 “우리는 장벽을 부수고 ‘다중 모달 커뮤니케이터’가 돼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있다”고 한 윌리엄의 말 역시 기계음으로 흘러나왔다.
강사 블룸은 “이들은 모두 시인, 작사가, 무용수, 가수이자, 배우다. 모두 너무 용감하다”고 칭찬했다. 토니는 수업의 의미에 대해 “친구를 만들게 하고 안전하고 창의적인 공간을 제공한다”라고 평했다.

이들은 장애를 아랑곳하지 않고 AAC 기술을 사용해 소통하면서 가사를 만들고, 곡을 선정하고, 배우로 분장해 연기를 하고 춤을 춘다. 뮤직비디오 ‘커뮤니케이션의 개척자들(Pioneers of Communication)’이 곧 나온다며 맛보기로 보여주며 자랑했다.
영상 속에서 학생 한 명 한 명은 카우보이모자를 쓴 채 경쾌한 음악을 배경으로 밝고 코믹한 동작을 취하고 짝지어 춤을 추기도 했다. 영상 아래 자막이 흐른다.
“Typing is our rhyme and reason.”(타이핑은 우리의 운율이자 이유다.) “We make progress through the conflict.”(우리는 갈등을 이기고 나아간다.) “We respect each other’s difference.”(우리는 각자의 차이를 존중한다.)
노래 가사가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해 영상에 미소를 짓게 되면서도 마음이 먹먹해졌다.
‘익스프레스 유어셀프’ 프로그램은 미라클 프로젝트가 2020년 정부 지원금으로 시작한 연구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퍼포먼스(관중들에게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개념이나 내용을 신체 그 자체를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예술)가 말을 못하는 장애인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질문에서 시작됐다. 음악은 언어 장애인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통념과 달리 긍정적인 효과가 입증이 됐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AAC 기술을 통해 소통하는 16세 이상 자폐 장애인들이 춤과 연기, 노래를 익히며 소통 기술을 배우는 이 프로그램이 탄생했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뮤직비디오까지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윌리엄은 “내게 이런 재능이 있는지도, 댄스를 좋아하는지도 여기 와서 알게 됐다”고 말했다. 기계음인데도 기쁨이 전해졌다.
자폐아 엄마, 자폐의 세계로 들어가다
공연 기반 장애예술 교육 커뮤니티인 미라클 프로젝트의 창립에는 자폐아를 둔 어머니의 좌절하지 않는 도전이 숨어 있다.

할리우드의 아동 연기 코치였던 일레인 홀은 러시아에서 입양한 아들 닐이 걸음마를 떼면서 자폐아 진단을 받은 뒤 인생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전통적인 치료법이 효과가 없자, 홀은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즉 닐을 비장애인인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대신 아들의 세계로 뛰어 들어간 것이다. 아들이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면 함께 빙글빙글 돌았고, 아들이 다른 자폐아들처럼 팔을 벌려 펄럭이면 아들과 함께 팔을 펄럭이며 새처럼 방 안을 날아다녔다.
이후 홀은 배우, 무용수, 음악가, 특수교육자 등 다른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자폐아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들의 세계에 동참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 교수법 덕분인지 닐은 서서히 고립의 세계에서 빠져나왔다.
홀은 이를 ‘자폐증을 여는 7가지 열쇠’ 기법으로 이론화했고, 직원 및 자원봉사자들에게 교육했다. 그렇게 해서 2004년 미라클 프로젝트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자폐 청소년들이 수업에 참여해 형제자매 혹은 비장애 친구들과 뮤지컬을 만드는 성과를 올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뮤지컬을 보며 환호하고 눈물을 흘렸다. 자폐 아동과 비장애 아동 사이에는 우정이 자랐다.
이들이 뮤지컬을 제작하는 과정은 독립영화 감독 트리시아 리건에 의해 다큐멘터리 영화 ‘자폐증: 뮤지컬’로 제작돼 2007년 뉴욕의 한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로스앤젤레스의 자폐 아동들이 스스로 뮤지컬 아이디어를 내고 대본을 써서 연습한 끝에 공연하기까지의 6개월 과정을 담은 이 다큐는 2008년에는 미국 HBO에서 방영되며 에미상을 받았다. 프로그램 디렉터 워런도 이 다큐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아 2012년부터 여기서 일하게 됐다.
미라클 프로젝트에는 AAC 소통 기반의 ‘익스프레스 유어셀프’ 외에 TV와 영화 출연을 돕도록 연기 지도를 하는 ‘나는 그것을 할 수 있어(I can do that)’ 프로그램, 뮤지컬 무대에 서도록 노래, 춤, 연기를 가르치는 ‘삼중위협’ 프로그램 등 대면/비대면의 다양한 수업이 있다.
또 사회 적응 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춘 ‘소셜 스킬 그룹’ 수업을 연령대별로 운영한다. 사회 적응 능력을 키우기 위해 헐리우드에 있는 코미디클럽 ‘웃음공장(래프 팩토리)’과 협업하고 있다. 스탠드업 코미디를 참관하고 코미디를 배워 연습하기도 한다. 워런은 “코미디를 보고 ‘남들이 이 대목에서 웃는구나’를 알고 배우는 거 자체가 소통 능력을 키우는데 중요하다”며 “자폐아들이 나만의 세계에 빠져 있으면 타인과 관계를 맺지 못한다. 여기서는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데 포커스를 맞춘다”고 강조했다.
로스앤젤레스=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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