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완벽한 남편이자 아빠였어… 사랑했고 고마웠고 꼭 다시 만나자

“저는 ‘킹콩’이라고 불렀어요.” 김연희(44)씨는 남편 김대철(44)씨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연희씨가 꺼낸 사진에는 큰 키와 다부진 체격, 까무잡잡한 피부색의 대철씨가 있었다. 연희씨는 “이 체구로 공중에서 고난도 기술을 선보일 때면 정말 킹콩 같았다”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눈가엔 눈물이 맺힌 채였다.

대철씨는 국내외 대회에서 다수의 수상 경력을 보유한 어그레시브 인라인 1세대 선수다. 은퇴한 뒤에는 다양한 국내외 대회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인라인스케이트 수입 매장을 운영했다. 대한익스트림액션스포츠연맹(KXF) 기술이사, 대한롤러스포츠연맹 부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그런 대철씨를 “어그레시브 인라인밖에 모르던 순수한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건강했던 대철씨는 올해 2월 13일 갑상샘 수술 후유증으로 쓰러져 뇌사 상태에 빠졌다. 한 달이 넘도록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그는 결국 3월 15일 가톨릭대 은평성모병원에서 3명에게 간장과 좌우 신장을 기증한 뒤 세상을 떠났다.


대철씨는 아내를 ‘왕비님’이라 부르고, 두 딸 바다(12)양과 별(9)양의 ‘머슴’을 자처하는 자상한 가장이었다. 일기장에 적어둔 인생 목표도 멋진 남편, 멋진 아빠, 든든한 아들일 만큼 그의 가족 사랑은 남달랐다. 대철씨의 하나뿐인 동생 대은(43)씨는 “제 시댁 모임에도 함께할 정도로 동생을 챙겼던 오빠”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대은씨 시부모, 즉 대철씨에겐 사돈어른들도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며 종종 눈물을 보인다고 한다.

연희씨는 대철씨에 대해 “연애할 때부터 다정했던 사람”이라고 추억했다. 부산 출신인 연희씨는 2006년 8월 광안리 해수욕장에 공연하러 온 대철씨를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대철씨는 그때부터 2008년 12월 두 사람이 백년가약을 맺을 때까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연희씨와의 사랑을 키웠다. 두 사람은 이후 대철씨가 나고 자란 서울 은평구에 터를 잡고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연희씨는 “없는 형편에 시작한 살림이었는데도 마냥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국내로 떠난 신혼여행 첫날부터 추억이 많았다. “대철씨가 열심히 찾아보고 예약했는데 도착해보니 여인숙에 가까운 허름한 곳인 거예요. 대철씨는 난감해 했는데 저는 평생 이야깃거리라면서 웃었죠.”



대철씨는 중학교 2학년쯤 합기도 도장에서 만난 박상준(44)씨와 상준씨의 친구 이태용(44)씨의 영향으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게 됐다. 고등학교 1학년쯤 자주 드나들던 서울 동대문구의 한 스포츠용품점 사장님의 후원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했고, 멤버 교체와 팀명 변경을 겪다가 대철씨, 상준씨, 태용씨, 이경준(44)씨, 김염(44)씨, 유태완(38)씨로 구성된 ‘AIR99’를 결성했다.

이들이 처음 어그레시브 인라인을 시작할 땐 제대로 된 강습소 하나 없던 시절이었다. 팀원들은 어그레시브 인라인을 다룬 영화 ‘에어본’ 속 장면들을 무작정 따라 하며 기술을 익혔다. 다치기 일쑤였고, 동작 하나를 익히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대철씨는 당시 최고난도 기술인 ‘백플립’을 완벽하게 구사했다. 특유의 점프력으로 뛰어오르면 관중 사이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상준씨는 “대철이가 착지하면 기물이 흔들려서 선수들이 난간을 붙잡고 버텨야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대철씨는 국내외 대회에서 수상은 물론 각종 CF와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 후배 양성에도 관심이 많아 ‘춘천 익스트림 대회’ 등 여러 대회 개최에 기여했다. 태용씨는 “비인기 종목 제품을 2003년부터 20년 넘게 수입해 판매한 것도 후배들이 제품을 구입하는 데 어려움이 없길 바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세대 선수로서 모범이 되겠다며 술이나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외국의 업계 관계자들과 교류하며 어그레시브 인라인의 저변 확대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틈틈이 영어를 독학했다. 대철씨와 중학교 단짝이었던 정하겸(44)씨는 그런 대철씨의 삶을 “한편의 성장 만화 같았다”고 표현했다.


대철씨는 갑상샘 수술 부위가 터지며 기도에 피가 차는 바람에 산소 부족으로 뇌 손상을 입었다. 처음엔 희망을 버리지 못하던 가족도 점차 “의미 있게 보내주자”고 마음을 모았다. 대은씨는 “그냥 떠나보내면 열심히 살았던 오빠의 삶이 허망하게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고 말했다.

연희씨는 아빠가 잠시 아픈 줄로만 알았던 어린 딸들에게 진실을 전했다. 죽음과 장기기증. 낯선 단어에 혼란스러우면서도 무언가 느껴졌는지, 딸들은 아빠를 면회한 자리에서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대철씨는 딸들과 면회한 다음 날부터 급속도로 상태가 악화했다. 연희씨는 “이제 정말 남편을 보내줘야 하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장기기증 수술 날 연희씨는 중환자실부터 수술실까지 마지막 길을 따라 걸으며 “사랑했고, 고마웠고, 꼭 다시 만나자”고 남편의 귓가에 속삭였다. 집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재운 뒤에는 장례식을 준비했다. 그는 장례식장을 꾸밀 사진 등을 챙기며 수술실에 누워있을 남편을 떠올렸다. 지금쯤 숨이 멎었을까, 아프지 않게 갔을까…. 새벽 3시쯤 “수술이 끝났다”는 병원 측 전화를 받을 때까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멈추지 않았다.


대철씨의 장기기증은 남은 이들의 삶도 변화시켰다. 상준씨는 “대철이가 준 가장 큰 선물은 삶이 언제든 끝날 수 있다는 것과 내 곁의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준 것”이라고 말했다. 연희씨는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 누군가에게 새 생명을 선물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일부분이 어딘가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위안이 되는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연희씨는 마지막으로 대철씨에게 꼭 전하고픈 말이 있다고 했다. “지금도 매일 아이들에게 나중에 꼭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얘기할 정도로 당신은 완벽한 남편이자 아빠였어. 자신의 전부를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사랑의 참뜻을 알게 해준 사람. 당신은 내가 태어나 가장 사랑하고 존경한 사람이야.”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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