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의 글로벌 경쟁력이 미국과 중국에 뒤처지면서 ‘실존적 도전’에 직면했다고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진단했다. 자국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책 수단을 총동원하는 미·중과 달리 유럽 경제는 각종 규제에 발목 잡혀 활력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유럽 경제의 근본적 체질 개선을 위해 연간 1200조원에 달하는 공격적 투자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드라기 전 총재는 9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유럽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유럽의 생산성을 높이지 못한다면 곧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며 “이는 실존적 도전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유럽의 근본 가치는 지속 가능한 환경을 유지하면서 번영과 평등, 자유, 평화,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라며 “유럽이 이런 가치를 국민들에게 제시하지 못한다면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고 강조했다.
드라기 전 총재는 유럽 경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연간 7500억~8000억 유로(1114조~1188조원)의 신규 투자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지난해 EU 국내총생산(GDP)의 4.4~4.7%에 해당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유럽 경제를 재건했던 마셜 플랜의 투자액이 각 수혜국 GDP의 1~2%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전례 없는 규모다. 탈탄소화 정책이 유럽 경제의 경쟁력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입장도 내놨다. 미·중보다 훨씬 전향적인 유럽의 기후변화 목표치가 유럽 기업들에 비용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어서다. 드라기 전 총재는 유럽 외 기업에 유럽 기업과 동일한 탄소세를 부과하는 내용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면밀히 조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CBAM 이행이 부진할 경우 탄소배출권거래 무상할당제 폐지를 유예함으로써 유럽 핵심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과 안보 분야의 대외 의존도도 낮출 필요가 있다. 드라기 전 총재는 유럽 시장에서 급속도로 점유율을 높이는 중국산 전기차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중국산 전기차 보급이 탄소배출을 줄일 수 있겠지만 유럽 친환경 자동차 산업에 위협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기 전 총재는 세계 반도체 생산 시설의 75~90%가 아시아에 집중된 점을 들며 EU 차원의 반도체 전략을 마련할 것도 촉구했다.
그는 또 EU 회원국이 2022~2023년 지출한 무기 구입비의 78%가 미국 등 유럽 외 국가에 돌아갔다며 “경쟁력 있는 유럽 방산 기업이 혜택을 못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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