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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엑스플로74’ 반세기에 즈음해서

박재찬 종교부장


1974년 8월 15일은 한국 현대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날이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이 정식 개통됐다. 서울역부터 청량리역까지 9개역 7.8㎞ 구간이 첫 운행을 시작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서울 지하철(1~9호선, 우이신설·신림선 포함)은 337개 역에 운행 구간만 357㎞에 달한다. 개통 첫해 하루 평균 23만명이었던 승객은 881만명(2024년 4월 기준)으로 38배나 늘면서 명실상부한 시민의 발로 자리매김했다.

제29회 광복절이기도 했던 이날은 온 나라에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날 오전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진행된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던 도중 청중석에 있던 재일 교포 문세광이 쏜 총에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후 5년 뒤 박 전 대통령 역시 총에 맞아 서거하고, 30여년 뒤 그의 딸이 대통령에 오르고 또 탄핵으로 물러나는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대중교통의 혁명’ 같은 지하철 개통 소식으로 인류의 기술 진보에 감탄을 하면서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새옹지마 인생을 실감케 한 날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날엔 또 다른 일도 있었다. 영부인 시해 사건이 발생한 국립중앙극장 서쪽으로 15㎞쯤 떨어진 여의도 5·16광장(현 여의도공원)에선 대규모 기독교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가 주최한 ‘엑스플로74’ 행사였다. 이틀 전인 13일 개막해 18일까지 이어지는 초대형 집회였다. CCC에 따르면 전도훈련요원 등록자만 32만명 정도였는데 당시 기독교인(약 300만명)의 10%가 한자리에 모인 셈이다. 집회 기간 다녀간 참가자만 655만명(연인원)에 달했다.

육영수 여사 시해사건이 발생한 15일엔 오후에 집회가 열렸는데, 육 여사의 비보를 접한 참가자들은 침통한 가운데서도 집회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당일 밤엔 폭우가 쏟아졌는데도 2만여명이 철야 기도를 이어갔다. 당시 엑스플로74의 방대한 행사 규모는 수치로도 드러난다. 30만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인근 70여개 학교의 3000개 교실이 개방됐다.

또 15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4만평 규모의 대형 천막촌이 조성됐다. 무엇보다 이 기간 42만3000여명에게 복음을 전했고, 이들 가운데 약 65%(27만3000여명)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

전년도에 같은 장소에서 열렸던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를 잇는 엑스플로74는 민족복음화대성회(1977), 세계복음화대성회(1980) 등 한국교회 부흥에 불을 지핀 초대형 전도집회들 사이에서 중요한 연결고리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주변에선 엑스플로74 개최를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행사 준비위원장이자 대회장인 김준곤 목사는 민족복음화에 대한 열망을 굽히지 않았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준비와 훈련을 거쳐 성공적인 행사로 치러냈다. 수많은 이들이 엑스플로74를 통해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노라 다짐했다.

최근 본보는 당시 집회 참가자들을 몇몇 만날 수 있었다. 반세기의 세월은 새파란 청년들을 반백의 머리에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노인들로 바꿔놨지만 저마다 털어놓는 믿음의 분투 이야기는 귀 기울이게 만들었다. “믿음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부딪히고 도전할 수 있는 마음을 품게 됐다.” 반세기 전 푹푹 찌는 8월의 땡볕 아래에서 믿음의 선배들이 건져낸 다짐과 결단의 고백들은 여전히 살아 숨쉬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50년 전 그날은 광복의 기쁨을 되새기는 날이었다. 동시에 지하철이 처음 뚫리고 영부인이 숨진 날이었으며 또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날이기도 했다. 오는 24일부터 닷새간 강원도 평창에서 열리는 엑스플로74 50주년 기념대회에서도 이 시대 젊은이들의 입에서 믿음의 고백과 결단이 이어지면 좋겠다.

박재찬 종교부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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