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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 첫 숨을 지켜본 당신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


친구 S에게는 팔순의 아버지가 계신다. 차로 다섯 시간 거리에 홀로 사시는 아버지를 일 년에 두어 번 찾아뵙는데 그마저도 먹고사는 일이 바빠 겨우 시간을 냈다. 나는 그때마다 바람 쐬러 간다는 핑계로 그 길에 동행했고 운전기사 노릇을 자처했다. 아버지를 위하는 그녀의 마음이 내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S는 마트에 들러 장을 잔뜩 봐서는 시골집 냉장고를 채웠고 웃풍을 막으려 방한 텐트를 사다 설치했다. 어떤 날은 이발소와 목욕탕에 아버지를 모셔다드렸고 빨래방에서 이불과 베개를 세탁하고 건조해 푹신한 이부자리를 만들었다. 또 어떤 날은 즉석사진관에서 우습게 생긴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었고 푸짐한 저녁 식사를 대접하며 소주잔을 기울여 그의 말동무가 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다섯 시간을 달려 본인의 팍팍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S는 아버지를 잘 보살펴드리지 못한다는 마음의 짐을 잠시 덜었고, 자신을 보며 활짝 웃는 주름진 눈이 아른거려 한참 눈시울을 붉혔다. 어릴 적부터 고생을 많이 한 S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지우고 살뜰한 딸이 되려 노력했다. 그런 친구를 곁에서 지켜보니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것만으로도 자식은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녀의 정을 차곡차곡 쌓던 S가 작년 여름 한 상조 회사 보험에 가입했다. 나날이 연로해지는 아버지를 뵐 때마다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언젠가 맞게 될 아버지와의 이별을 자연스레 생각했으리라. 나 역시 오래전 부모님을 생각하며 ‘내가 첫 숨을 뱉을 때 당신이 곁에 있었듯 당신이 마지막 숨을 뱉을 때 반드시 곁에 있겠다’라는 다짐을 한 적이 있다. 내게는 막연하게 느껴지는 그 언젠가의 일이 늦둥이인 S에게는 피부로 와닿는 현실이었다. 도리와 책임을 다하겠다는 마음은 가슴 저린 슬픔과는 별개의 영역이었다. 평소 천진난만하게 굴던 S에게서 어른이 된 자식의 서글픈 심정이 느껴졌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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