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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 2024년, 그리고 1945년

장창일 종교부 차장


영화 ‘파묘’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일제가 한반도의 정기를 끊기 위해 곳곳에 박았다는 ‘쇠말뚝 음모론’이 영화를 관통한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기발한 말뚝까지 등장하면서 관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부분이 흥행을 이끄는 요인이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일제 쇠말뚝이 우리 정기를 끊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긴 세월 이어진 일제 식민지배의 아픔이 낳은 괴담이다. 이를 영화적 상상력으로 구현해 낸 건 어디까지나 영화 안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더욱이 식민지배 같은 고통스러운 역사가 영화의 소재로 선택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영화적 상상력에 좌파라는 굴레를 씌워 이념의 도마에 올리는 건 머리를 갸웃하게 만든다. 실제 이 영화가 좌파적 메시지를 담고 있을까. 가부를 따지기 전 여기엔 더 큰 허점이 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에 문제를 제기하면 좌파고 찬성하거나 묵인하면 우파라는 궤변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어서다. 식민지배와 좌우 이념은 별개다.

해방된 지 79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일제’가 뜨거운 감자다. 광복 이후 우리 사회가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한 채 격랑에 빠진 게 큰 이유로 꼽힌다.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도 못했는데 미 군정이 시작됐고 극심한 이념 갈등의 문이 열렸다. 그 뒤 6·25전쟁이 이었다.

1948년 제헌국회는 일제강점기 때 자행된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설치하며 조사에 나섰지만 얼마 가지 않아 반민특위는 간판을 내려야 했다. 이 조직이 제구실을 못한 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반민특위가 애초 취지대로 반민족 행위자를 찾아내 처벌했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상상해 본다.

일부에선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벌과 우리 역사를 비교한다. 나치는 1940년부터 4년 동안 프랑스를 점령했고 이 짧은 기간 수많은 부역자가 나치 완장을 차고 민족을 배신했다. 나치 패망 후 프랑스는 1만명이 넘는 부역자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자행된 인민재판식 사적 제재까지 합하면 수만명이 처형됐을 거로 본다. 이토록 많은 사람을 부역자로 처벌한 건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피아(彼我)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치 통치가 시작되자마자 적의 편에 선 이들이 사형대에 섰고 이들을 처벌한 뒤 새 미래를 그렸다.

일제강점 35년은 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세월이었다. 반민특위가 해야 했을 일은 죄의 정도에 따라 처벌을 구분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벌금형부터 사형까지 형을 집행했어야 했지만, 조사를 못한 채 치욕스러운 역사를 덮어버렸으니 지금까지 식민지배 그림자가 길게 이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언젠가는 아픔이 해소돼야 한다. 그렇다고 윤석열정부가 강조하는 ‘우방국인 일본과의 협력’만 앞세우는 건 또 다른 앙금을 낳기 쉽다. 여전히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동원 피해자가 살아있는데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은 채 협력만 앞세우는 건 문제다. 일본과의 협력을 위해 우리 안에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전 세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안 좋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 북한까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말이다. 인기몰이하는 영화 한 편이 소환한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와 이를 걸고 확산하는 좌파 논란 속에서 우리 안의 평화와 화해의 미래를 그려 본다.

성경은 ‘때’를 강조한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8) 과연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할 때일지 자문한다. 적어도 미워하고 전쟁할 때는 아니지 않을까.

장창일 종교부 차장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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