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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기업 규모 족쇄 풀어야 역동경제 된다

정철 한국경제연구원장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더 많은 대기업의 일자리가 필요하다’라는 제목의 보고서가 나왔다. 요지는 국내 대기업의 일자리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낮기 때문에 양질의 일자리도 그만큼 적고, 이는 입시 경쟁의 과열과 부의 대물림 현상, 저출산, 수도권 집중 등의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면한 핵심적인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기업의 규모화(scale-up)로 양질의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대기업 비중은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OECD에 따르면 2020년 우리나라의 대기업(종업원 수 300명 이상) 비중은 전체 사업체 중 0.09%로 OECD 조사 대상 34개 국가 가운데 33위다. 2021년에는 0.07%로 낮아졌다. ‘신생아 초저출산’뿐만 아니라 ‘대기업 초저출산’도 또렷한 경제 현상으로 굳어지는 양상이다.

한국의 대기업 비중이 낮은 이유는 다양하나 근본적 원인 중 하나는 대기업에 대한 불리한 제도적 환경이다. 중소기업이었을 때에는 규제보다는 지원이 우선되지만 규모가 커 갈수록 지원은 없어지고 규제만 급격하게 늘어난다.

한국경제인협회 조사에 따르면 2023년 6월 기준 기업 규모에 따라 차등적으로 적용되는 차별규제가 61개 법률에 총 342개인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기업 규모가 커 갈수록 규제 수는 급증한다는 것이다. 기업의 자산 규모가 5000억원 미만일 때 적용받는 규제 수는 57개이지만 5000억원을 넘기게 되면 183개로 3.2배 급증한다.

기업이 성장함에 따라 받게 되는 규제의 질도 문제다. 한국은 세계 GDP(국내총생산) 13위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은 낡은 규제, 즉 갈라파고스 규제가 많다. 기업 규모별 차별규제 가운데 30.1%(103개)가 도입된 지 20년이 넘은 것들이다. 규제가 오래됐다고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게 공정거래법상 대기업집단 지정 제도다. 기업 규모가 크면 대기업집단으로 지정하고 규제하기 시작한 것은 1987년부터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제도의 근간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대기업집단 규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정 시절 일본 전범 기업집단을 규제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현재는 한국에만 남아 있는 대표적 갈라파고스 규제다.

사업체 규모가 커야 양질의 일자리가 만들어진다는 KDI 보고서의 전제를 따르면 기업 규모의 성장을 통해 대기업을 늘리는 것이 양질의 일자리 창출은 물론 역동적 국가경제 구현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갈라파고스 규제, 낡은 규제를 혁파해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기업들이 이미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해 세계 시장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국내 비중도 감소함에 따라 과거 폐쇄경제를 전제로 한 대기업 경제력 집중 규제는 1980년대 정책 틀에 갇힌 것이라는 비판에 취약해졌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국가경제의 성장은 기업의 성장과 그 궤를 같이한다. 경제 성장을 결정짓는 노동과 자본의 투입, 그리고 혁신을 통한 생산성 제고 노력의 주체가 바로 기업이고, 기업들의 이러한 활동이 활성화돼 소기업이 중기업, 대기업으로 성장해 나갈 때 경제의 역동성이 크게 신장하는 것이다.

결국 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는 제도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급선무다. 공정한 시장과 기업의 성장이 보장되는 환경은 기업가 정신 확산과 투자 확대를 촉진하고 우리 경제가 직면한 성장동력 약화, 저출산, 불평등, 청년실업 등의 문제를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라고 할 수 있다.

정철 한국경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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