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 주말 저녁 가족과 식사하며 틀어놓은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출연자가 다른 출연자를 꾸짖었다. “그럴 때는 틀렸다고 하는 게 아니라 다르다고 해야 하는 거야” “또 그러네, 다르다!”라면서 그의 말을 수차례 교정했다. 음식을 먹느라 화면을 보지 않아 장면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데 그 말만은 아직 남아 있다.
‘다르다’라고 해야 할 부분에 ‘틀리다’를 쓰는 경우를 종종 접한다. 좌우 그림을 비교해 다른 부분을 찾는 것을 ‘틀린 그림 찾기’라고 하는 게 대표적이다. 단어 뜻을 몰라 그렇게 쓰는 건 아닐 것이다. 습관으로 틀리다 속에 다르다를 포함해 말해 왔을 수 있다. 뜻만 통하면 되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르다, 틀리다를 호환해 사용하면 안 된다. 상황에 맞춰 적합하게 사용해야 한다. 말은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준다.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인 에이브럼 노엄 촘스키나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등은 언어와 사고의 연관성 등을 연구한 학자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사고 능력은 학습된 언어의 한계 내에서만 가능하다”거나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면서 말과 단어 습득,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다 보면 종국에는 차이와 다름을 틀림 속에 가두게 된다. 다른 것을 틀리다고 인식하면 편견과 차별이 생기기 쉽다. 나와 같지 않으면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 나쁜 것이 된다. 성별 세대 인종 장애 학력 계층, 심지어 성격과 사고까지 나와 같지 않으면 틀렸다고 규정짓는 경우가 많아진다. 학교나 가정에서 행동을 교정받으며 들을 수 있는 ‘왜 남들처럼 행동하지 않냐’는 질책이나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 밑바닥에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생각이 깔려 있다. 무의식에 ‘다른’ 것을 불편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준다. 현재 우리에게 당면한 갈등의 원인이 다름과 틀림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 있다면 과장일까.
1814년 간행된 조선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중 권 161~178을 ‘일득록(日得錄)’이라고 한다. 정조의 언행을 듣고 본 그대로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훈어(訓語)편에 ‘무물아(無物我)’라는 말이 나온다. 정조는 무물아를 ‘일평생 간직할 것’이라고 했다. 무물아는 상대와 나의 구분이 없다 또는 내 것이 없다는 뜻이다. 정조의 생각을 풀면 이렇다. 모든 것에 주체와 객체가 있고 모두 주체이기도 객체이기도 하다, 다름을 전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정조의 정치관을 대변하는 말 중 하나는 상하사방 균제방평(上下四方 均齊方平)이다. 공평함, 다양성 인정, 손상익하(損上益下) 등으로 요약된다.
우리 정치제도는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대의제(代議制)를 채택하고 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다수결 원리를 따른다. 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보다 합리적일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다수의 의견이 반드시 옳은 건 아니어서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반영할 만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민(民)의 동의도 얻어야 한다. 초등학생도 다 아는 내용을 늘어놓는 이유는 알 만한 사람들이, 반드시 이 과정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만을 강변하며 ‘다른’ 상대를 틀렸다고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을 갖거나 다수가 되면 무슨 일을 해도 옳고, ‘다른’ 상대는 무조건 틀린 건가. 패거리 지어 다수가 되려 하고, 승리만을 위해 상대를 악마화하고, 거친 말로 감정을 자극하면서 ‘다름’을 ‘틀리고 나쁜 것’으로 몰아가는 행태를 당연한 듯 자행하는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지 암담하다. 이런 저급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할 때다.
전재우 사회2부 선임기자 jw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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