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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맥락을 만드는 공부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현실을 영위하는 사람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맥락을
헤아리는 공부가 필요하다

공부는 왜 하는가. 지금보다 나아지기 위해서다. 과거를 상대화해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 공부라고 말한 사람은 정희진 연구자다. 여성학자, 서평가, 오디오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칼럼니스트 등 명명이 다양한 그에게 나는 공부 실천가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고 끊임없이 읽고 쓴다. 그가 읽는 책과 논문, 연구 자료들은 몸을 통과해 창의적인 글로 세상에 나온다. 내가 짐작한 것보다 빠른 속도, 엄청난 독서량을 확인하고 놀랐다. 술 모임이나 친목을 위한 약속을 하지 않는 그는 스스로를 ‘침대에서 읽고 먹고 자는 침순이’라고 유머러스하게 소개했다.

그에게 ‘공부’에 대한 강의를 청해 듣기로 한 것은 새해 들어 제일 잘한 일로 꼽고 싶다. 그는 공부의 한자 뜻을 언급하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공부의 ‘공’ 자는 장인 공이다. 공부는 장인이 재료를 주무르고, 깎고, 다듬어 유일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나 자신’을 조각하는 일이라고 했다. 조각가에게 조각칼이 있는 것처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몸이 존재한다. 자신을 알아야 세계라는 텍스트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법. 무딘 칼로 무를 써는 것과 채칼로 무를 써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듯, 같은 세계를 마주해도 정확한 ‘나 자신’의 필터를 거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느낀 답답함을 풀기 위해 공부했다는 정희진씨에게는 자신이 어떤 사회 구조 안에 놓여 있는지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나와 다른 존재들, 나의 언어로 포섭되지 않는 낯선 언어들과 마주해야 하는 것.

한국 사회의 담론 형성 과정은 매우 빈곤해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본질에 닿지 못한 기존의 통념만 반복하는 허무한 이야기들이 재생산된다. 정희진씨가 사례로 든 정의기억연대의 불의를 폭로한 위안부 피해생존자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과 그 반응은 강의를 들은 모두에게 탄식을 낳았다. 4년 전의 그 일에 대한 전문가와 관련자들의 분석은 본질에서 멀었다. “누군가 사주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대신 써주었다” “개인의 말로 사회운동이 타격받아서는 안 된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생물학적 이치다. 위안부 이후를 대비하자” “모두 신문을 보지 말자”와 같은 한 줄 요약으로 설명될 전문가의 의견은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가는 형국이었다.

공부는 맥락을 만든다. 특정한 자리에서 자신이 볼 지점을 확보하는 것이 맥락이라면 위의 사례는 객관성을 구성하지 않는, 통념의 나열일 뿐이었다. 선과 악, 원인과 결과, 옳고 그름 같은 이분법은 모든 개별적인 맥락과 상황을 흡수해버린다. 세상은 이분법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축구 경기에서는 그물 안에 공이 들어가기만 하면 골이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으니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맥락을 헤아리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에서 이분법에서 벗어나기가 제대로 된 공부와 등가라는 생각을 했다.

멈춰 있는 객관성이 아니라 유동하는 당파성을 추구하는 태도,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파악하고 그 위치에서 사회를 주관적으로 바라보면서 각자의 객관성을 만들어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강의 결론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그가 설명한 ‘객관’은 설득력이 있었다. ‘객’은 손님을 뜻하는 한자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손님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상대를 존중하고 경청하는 손님으로서의 객관성이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타인의 위치를 섬세하게 감지하는 것이 공부이기 때문에. 그는 개인의 공부가 사회운동이 될 수 있다는 선한 가능성을 언급했다. 공부는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 공부의 기본 가치 판단은 창의력이니, 고루한 통념을 제거하고 후퇴 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성찰 없는 통념이야말로 사회의 소통을 막는 것이다.

‘자신을 알고 맥락을 만드는 창의성이 공부’라는 정희진식 공부 정의를 가슴에 품으며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겠다. 내 인생은 지금보다 나아져야 하니까.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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