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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준 칼럼] 윤-한 충돌, 어디선가 본 듯한


박근혜-유승민 ‘배신정치’ 충돌
문재인-윤석열 ‘조국사태’ 결별
연상케 한 윤석열-한동훈 사태
정치시계 거꾸로 돌려 놓은듯

황당해하는 국민들에게
어정쩡 봉합 아니라 말하려면
명품백 문제 진솔히 설명하고
공천서 윤-한 갈등 배제해야

약속대련은 아닐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충돌을 대뜸 그렇게 부른 것은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였는데, 다분히 그의 경계심 섞인 비평이지 싶다. 대통령과 맞섰다는 걸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터라 대통령에게 맞서는 다른 인물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을 테니까. 이렇게 위험한 장면을 연출하고 소화할 만큼 정치에 능숙하다면 명품백 문제를 이 지경까지 끌고 왔겠나. 난데없었던 이틀간의 충돌은 짜고 친다는 느낌보다 왠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줬다.

용산에서 한 위원장 사퇴를 압박하며 내세운 구실은 ‘자기 정치’였다. 김경율 비대위원의 총선 출마에 거든 것을 사천(私薦)이라 했고, 친윤 인사들도 “위원장 자리를 이용해 자기가 대권주자로 발돋움하려는 것”이라 공격했다. 이준석 대표를 끌어내릴 때도 동원됐던 자기 정치란 말(이준석의 혁신위원회를 친윤 세력은 “자기 정치를 위한 사조직”이라 했다)의 저작권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있다. 2015년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찍어내면서 “정치는 민의를 대신해야지, 자기의 정치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선 안 되는 것”이라며 ‘자기 정치=배신 정치’로 규정했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정부에 쓴소리 하던 여당 사령탑을 내쫓을 때 박 대통령이 썼던 말은 정권이 두 번 바뀌고 되살아났다. 김건희 여사 문제에 나름의 쓴소리를 꺼낸 한 위원장에게 그 말이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박근혜-유승민의 충돌이 떠올라 정치 시계가 10년 전으로 돌아갔나 싶었는데, 기시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 위원장은 윤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꺼낸 파격 발탁 카드였다. 그가 법무장관에 기용되리라 아무도 예상치 못했고, 그것을 발판 삼아 여당 대표 자리에 섰다. 이런 파격의 원조는 윤 대통령이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서울중앙지검장에 전격 발탁되고 뒤이어 검찰총장에 직행했던 과정은 한 위원장이 지금 걷고 있는 경로와 다르지 않다. 이런 닮은꼴 상황에서 김건희 리스크에 터져 나온 윤석열-한동훈의 충돌은 조국 사태를 둘러싼 문재인-윤석열의 충돌을 떠올리게 했다. 파격적인 발탁이 다시 충격적인 결별로 이어질 뻔한 사건을 보면서 이번엔 정치의 시계가 5년 전으로 돌아갔나 싶었다.

박근혜-유승민, 문재인-윤석열 충돌은 집권 세력의 선거 패배로 이어졌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새누리당은 이듬해 총선에서 유승민 공천 탈락, 김무성 옥쇄 파동 등 자중지란을 겪으며 제1당 자리를 내줬고, 더불어민주당은 대선에서 정권을 내줬다. 지난 정부, 그 전 정부에서 선거 패배를 부른 변곡점의 양상이 공교롭게 이번 윤-한 충돌에 다 들어 있다. 이는 대통령의 국정 의지를 의심케 한다. 지금까지 총선만 바라보고 왔던 것 아닌가. 거대 야당과 타협하지 않은 것은 총선에서 어떻게든 의석을 확보해 제대로 국정을 펴겠다는 뜻일 텐데, 윤석열정부의 성패가 걸린 선거를 날려버려도 상관없다는 양 총선을 코앞에 두고 갈등과 충돌을 자초했다.

한 위원장은 사퇴하는 대신 폴더 인사를 했다. 대통령 뜻을 끝내 거부하면서 대통령을 예우해 파국을 막은 셈이 됐다. 이번 사태에서 여권에 그나마 긍정적인 대목이다. 그는 변화, 혁신, 세대교체, 새로운 정치 같은 키워드와 함께 정치판에 들어섰다. 이는 사람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를 뜻했는데, 지난 한 달간 꺼내놓은 말은 그리 새롭지 않았다. 불체포특권 포기, 세비 반납, 의원수 축소 등 대부분 우리가 들어본 얘기, 알고 있는 얘기였다. 새로운 이미지와 별로 새롭지 않은 말의 불협화음 속에 신선함이 퇴색하려 할 때 대통령에 맞서는 상황이 터졌다. 여당 정치인에게서 좀체 보기 어렵던 그 모습이 신선함의 유통기한을 조금은 늘려줄지 모른다.

이제 난데없는 소동에 황당해한 국민에게 어정쩡한 봉합이 아닌 새로운 시작임을 설득하는 숙제가 여권에 남아 있다. 대통령은 명품백 문제를 진솔하게 얘기해야 한다. 선거판까지 논란이 이어지는 것을 막아 이번 총선에서 국정동력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공천에서 윤-한 연장전이 벌어진다면 선거는 해보나 마나다. ‘김경율 사퇴’ 같은 거래는 이번 사태의 그나마 긍정적인 효과도 거덜내버릴 것이다. 그리고 한 위원장은 ‘이재명 민주당’ 비판처럼 이미 다 아는 것 말고 국민에게 건넬 새로운 이야기를 어서 찾아야 한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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