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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 말과 말, 그리고 말

장창일 종교부 차장


2차 세계대전 초 나치 독일의 기갑부대는 견고했던 마지노선을 우회해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의 아르덴 숲을 돌파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자신만만하던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허를 찔렸다. 프랑스 평원에 갑자기 나타난 나치 기갑부대는 영·프 연합군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피할 곳은 많지 않았고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한다는 건 엄두를 낼 수도 없었다. 결국 수십만명의 군인들은 개인화기까지 버리고 프랑스 서부 해안으로 줄행랑쳤다.

그렇게 모여든 곳이 덩케르크였다. 영화 ‘덩케르크’의 배경이 되는 바로 그곳이다. 하지만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포기하지 않았다. 해변에 고립된 양국 주력을 민간 선박을 이용해 탈출시켰던 ‘다이너모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덕에 연합군은 반격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해변에 고립된 채 나치에 무릎 꿇었다면 세계 역사는 지금과 크게 달랐을 것이다.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는 데 처칠의 지도력이 한몫했다. 그중에서도 처칠의 입이 수훈갑이었다. 명연설가였던 그는 진정성 있는 연설로 국민의 마음을 한데 모았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성공은 마지막이 아니다. 실패는 치명적이지 않다. 중요한 것은 굴복하지 않는 용기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승리해야 우리는 생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단결된 힘이 기필코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좋지 않은 발음의 처칠이 절규하듯 뱉어낸 메시지가 벼랑 끝 영국을 살린 비밀 병기였다.

대척점에 놓인 말도 있다.

임명직 공무원들의 인사청문회가 대표적이다. 후보자가 과거 했던 발언이 발목을 잡는 걸 심심치 않게 본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부인해도 어디엔가 말의 꼬리가 남아 현재의 나를 괴롭히는 게 세상 이치다. 말실수로 낙마하는 이들을 보며 말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말이 넘쳐나는 시대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덕담과 다짐, 계획도 줄을 잇는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말이 많을수록 자주 궁색해지니 속을 지키라”고 조언했다. ‘말이 많으면 자주 곤란해진다’는 의미의 다언삭궁(多言數窮)이 여기에서 나온 사자성어다.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이 아닌 셈이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기표(記標)와 기의(記意)의 조합을 말로 규정하면서 구조주의 언어학의 문을 열었다. 기표에 기의를 녹여야 말이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기표란 발음과 음성, 단어의 표현 영역이다. 1월이 시작되면 ‘새해’라고 말하는 게 기표다. 기의는 기표에 의미를 부여하는 영역이다. 새해에 희망이라는 의미를 담는 식이다. 기표만 나열한다고 말이 되는 게 아니다. 각 단어의 의미, 결국 기표에 기의를 담아 이를 곱씹은 뒤 입으로 뱉어야 그게 의미 있는 말로 변화한다.

성경은 ‘지혜로운 사람의 혀’ 비유를 통해 우둔한 자의 값없는 말을 비판했다.

새번역 성경 잠언 15장 2절에는 “지혜로운 사람의 혀는 좋은 지식을 베풀지만 미련한 사람의 입은 어리석은 말만 쏟아낸다”고 했다. 지혜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무게가 이처럼 다르다.

4월 총선을 앞두고 많고도 많은 말 위에 또 다른 말이 더해지고 있다. 선거 기간 후보자들이 내뱉은 약속을 공약(公約)이라고 한다. 유권자를 향한 약속인 공약이 지켜지지 않아 늘 사달이 난다. 그래서 ‘빌 공’자를 써 공약(空約)이라 꼬집기도 한다.

좋은 말만으로 세상이 바뀔까. 역시 말은 말일 뿐이다. 공약이 실천으로 이어지고, 복음의 메시지가 삶의 변화로 연결될 때 말의 가치가 빛을 발한다. 새해에는 허다한 말의 종착지가 삶의 변화이길 바란다.

장창일 종교부 차장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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