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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이제 ‘강대국 외교’를 넘어설 때다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지역연구센터장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펴낸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책이 나온 지 40주년이 되던 2017년 ‘초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이 유행했다. 같은 해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이 당시 초불확실성에 큰 몫을 했다. 2024년 도널드 트럼프의 재등장과 당선 가능성이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트럼프 2기가 시작되면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은 완전히 막을 내리는 것 아닌가라는 예측도 나온다.

불확실성의 더 큰 배경인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은 그 역사가 이제 20년에 가까워지고 있다. 미·중 전략 경쟁은 경제전쟁으로, 첨단 기술전쟁으로, 공급망을 둘러싼 경쟁으로 확산되고 세분화되고 있다. 강대국 경쟁의 격랑 속에서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그 틈바구니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분쟁 등이 국지적 혹은 글로벌 차원의 위기를 더한다. 국제사회의 지지부진한 대응 속에 기후위기도 빠르게 우리를 엄습하고 있다. 위기에 위기가 겹치고 불확실성에 불확실성이 더해지는 시기다. 중첩된 위기는 극복하기 어렵다. 그 때문인지 위기 극복이란 말 대신 위기를 겪고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재빠르게 원상태를 회복하는 능력, ‘회복력(resilience)’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외교에서, 대외정책에서 회복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다변화’가 키워드다. 충격과 압력을 분산하고 도움을 극대화할 수 있는 다변화된 협력 네트워크의 존재와 이런 네트워크를 가능케 하는 경직되지 않은 유연함이 회복력 강화의 비결이다.

한국이 다변화된 협력의 네트워크를 가질 때 주변 강대국에 대한 협상력도 커진다. 미국, 중국뿐만 아니라 지역의 중견국, 개발도상국과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으로 긴밀히 연결된 한국의 독자적이고 전략적인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압력과 위험은 이런 네트워크를 통해 분산되고, 한국의 목소리와 자율성은 이런 네트워크를 통해 강해진다. 다양한 협력의 네트워크 구성은 기회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위험을 분산하는 포트폴리오의 구성이며 외교력을 증폭하는 메커니즘이다.

한국은 이미 인도·태평양(인·태) 전략이라는 외교 다변화를 위한 대안이 있다. 다만 인·태 전략이 미국과 일본에 매몰되면 한국의 회복력, 네트워크 강화에 새 부가가치를 더하지 못한다.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높고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환경에서 우리가 미국, 일본, 중국과 같은 몇몇 국가에만 의존한다면 이는 우리의 취약성, 대외전략의 경직성만 드러낼 뿐 우리 힘을 강화하지 못한다. 물론 주변 강대국 관계는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더 넓은 인·태 지역을 봐야 한다. 한국의 최대 경제협력, 인적 교류 파트너이자 지리적으로 가까운 아세안 국가와 관계는 이제 발전기를 넘어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단순한 협력을 넘어 아세안과 전략적 협력의 심화가 필요하다. 한국과 아세안 국가들은 서로에게 위협적이지 않고 좋은 상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미·중 경쟁을 포함한 복합 위기 속에 한국과 유사한 전략적 고민을 가진 아세안 국가와 어떤 협력을 통해 공동의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

강대국 이익이 아닌 지역 중소국가들에 도움이 되는 규칙기반 지역질서를 이야기하자면 유사 입장 국가인 호주와 뉴질랜드가 중요한 협력 파트너다. 엄청난 인구와 잠재력을 가진 인도는 미래의 기회를 만들고자 하는 한국에 중요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한국의 도움과 발전 경험 공유를 기대하는 남아시아 국가와 태평양 도서국은 그 숫자를 감안할 때 한국 외교의 목소리를 강화할 수 있는 지지 기반이 될 수 있다. 물론 오랜 세월 한국의 생존을 위해 강대국에 의존했던 대외정책 관성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행히 이런 관성을 탈피하려는 노력이 자라고 있다. 새로운 위기가 닥치기 전에 이런 변화의 목소리가 우리 외교를 주도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지역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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