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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우 칼럼] 나라가 ‘환상’ 속에 살고 있다


‘국뽕’같은 도취, 막연한 기대
엄혹한 현실 직시하는 눈 가려

잠재성장률 이미 1%대
생산성 향상 없으면
저성장→갈등 격화 악순환
보호무역 득세도 대형 악재

지금은 위기의식 필요한 때
냉정하게 포퓰리즘 가려내야

K팝, K푸드, K컬처에서 K라면, K조선, K전자, K방산까지. 한국(Korea)의 영문 머리글자를 따와 한국식, 한국형, 한국산임을 부각하는 ‘K’ 붙이기가 유행이다. 애초 한국 대중문화에 국한됐던 조어가 어느덧 업종과 분야를 가리지 않고 퍼지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외국인들이 김치 냄새에 이맛살을 찌푸리던 것은 흔한 풍경이었다. 이제 한국은 세련되고 쿨(cool)함의 대명사가 됐다. ‘한국 것’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과 태도가 이토록 짧은 시간에 변한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하지만 이를 넘어 ‘자기도취’의 분위기가 풍긴다. 우려되는 결과는 이렇다. 한국인은 태생적으로 탁월하다는 민족적 우월감의 고조와 한국은 어떻든 성공할 수밖에 없다는 위험한 자만심이다. 국가와 마약 히로뽕의 합성어인 ‘국뽕’은 이를 상징한다.

자기도취는 현실을 직시하는 눈을 가린다. 안팎에서 몰아치는 도전이 지금처럼 거셀 땐 특히 걱정스럽다. 일부 분야나 개인의 성공에 취해 공동체에 닥치는 체계적 위험을 무시할 수 있다.

한국이 현재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성장 동력의 상실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추계한 ‘한국의 장기경제성장률 전망’은 암울하다. 한 경제의 기본 체력을 나타내는 게 잠재성장률이다. 노동과 자본의 투입, 그리고 이 두 요소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하는지 나타내는 총요소생산성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총요소생산성은 그 경제의 생산성 수준을 나타낸다. 기술·교육 수준, 사회제도의 효율성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한국은 저출산에서 비롯한 노동투입 급감과 생산성 부진이라는 두 가지 난제에 동시에 협공당하고 있다.

KDI가 내놓은 현재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 하지만 이미 1%대라는 연구자가 적지 않다. 실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해 1.9%, 내년은 1.7%로 추정한다. KDI는 2030년대 초반에 잠재성장률이 1%대 초, 2050년에는 0.5%로 주저앉으리라고 한다. 이마저도 낙관적이다. KDI는 총요소생산성의 성장률 기여분을 1%로 가정하고 장기성장률을 추산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2010년대 총요소생산성의 성장률 기여분이 평균 0.7%에 그쳤다는 점에서 이는 현실성이 낮다. 2020년 이후 현재까지 4년만 봐도 코로나 영향과 구조개혁의 지연으로 우리 경제의 생산성은 오히려 뒷걸음질 쳤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앞으로는 생산연령인구 급감으로 노동 투입은 성장률에 이바지하기는커녕 성장률을 갉아먹는 마이너스(-) 요인이 된다. 노동시장 유연화, 교육제도 개혁, 시장진입장벽 제거, 규제 혁파 등을 통해 생산성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성장률이 더 빠르게 떨어질 것이다.

대외 환경의 급변도 공포감을 준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노골적으로 보호무역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사실상 같은 길이다. 내년에 트럼프가 재집권할 가능성도 상당하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는 껍데기만 남았다. 전후 자유무역체제에서 가장 수혜를 입은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이다. 보호무역주의 득세는 수출을 성장 엔진으로 번영해온 한국에는 식은땀이 날 정도의 악재다.

급격한 성장 동력 저하를 우려하는 것은 그 후과가 무섭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미사일이 고도화하고 중국의 군사력이 날로 증강하는 현실에서 한국은 국가안보에 상당한 자원을 배분해야 한다. 이는 생존의 문제다. 이에 못지않은 게 고령화·저출산으로 가파르게 증가하는 복지 수요에 대응하는 일이다. 이런 가운데 성장의 과실이 줄어들면 이미 분출하기 시작한 세대·계층·지역 간 사회갈등이 한층 격렬해질 것이다. 성장률 하락→사회갈등 격화→의회민주주의 위기의 악순환 고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

한 사회의 에토스(성격·기풍)가 긍정과 자신에 차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 한국 사회의 기풍은 ‘어떻든 잘되겠지’ 하는 나태하고 막연한 기대나 자만에 가까워 보인다. 거대한 위험이 다가오는데도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위기의식이 박약한 게 위기의 근본 원인일 수 있다. 각성한 시민의 최우선 급무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세력을 가려내는 것일 테다. 부담을 미래와 후세로 떠넘기고 기득권을 옹호하는 자들, 그러면서도 ‘공짜 점심은 가능하다’며 달콤하게 유혹하는 이들 말이다.

배병우 수석논설위원 bwb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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