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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 나와 너, 그리고 내일

장창일 종교부 차장


‘4000만명·5500만명·250만명.’ 제1,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서 죽거나 다친 사상자 숫자다. 무수한 생명이 1914년부터 1953년까지 불과 39년 사이에 사라졌다. 이토록 수많은 생명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고 이보다 몇 배나 많은 이들이 가족, 친구와 생이별했다.

숫자에는 죽거나 다행히 살아남은 이들의 희로애락은 조금도 담기지 않는다. 전쟁이 잔혹한 건 숫자로 기록된 통계로 기억될 때가 적지 않아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50년 만에 커다란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지난 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에 의해 야기된 이번 전쟁으로 ‘죽음의 숫자들’이 연일 쌓이고 있다. 숫자로 기록되는 전쟁에는 어떤 아픔도, 눈물도, 분노도 낄 자리가 없다.

에릭 라슨의 ‘폭격기의 달이 뜨면’은 1940년부터 시작된 나치 독일의 영국 공습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레이더나 항법장비가 부실했던 당시에는 오직 큰 달이 떠올라야 야간 비행과 폭격이 가능했다.

1940년 11월 14일 저녁이었다. 영국 코번트리 상공에 구름이 걷히고 보름달이 드러나자 ‘폭격기의 달’이 떴다는 두려움이 확산했다. 잠시 후 굉음과 함께 나타난 루프트바페(나치 공군) 폭격기가 수천㎏에 달하는 폭탄 2만여발을 토해냈다. 이날만 건물 2294채가 산산이 부서졌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비인간적인 폭격의 기록이 책 곳곳에 쓰여 있다. 하지만 폭격, 영국왕립공군(RAF)과 루프트바페 사이의 공중전만 기록된 건 아니었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사이에도 평범한 일상을 살았던 영국인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진정하고 하던 일을 하세요(Keep calm and carry on)’란 구호를 따라 대피소에서 잠을 청하고 아침엔 일터로 나섰던 이들이 대표적이다. 아이들도 학교에 갔고 잿더미 틈에서 숙제를 마쳤다. 청춘은 사랑에 빠졌고 전쟁통이었지만 결혼식도 열렸다. 만연한 죽음 속에서도 새 생명은 태어났다.

가자지구에 연일 이스라엘이 쏜 미사일이 쏟아지고 있다. 17일(현지시간) 가자지구의 한 병원이 공습을 받아 최소 500명이 숨졌다는 보도도 나왔다. 분리장벽과 지중해로 사방이 막혀 마땅히 피란 갈 곳도 없는 가자지구에서 매 순간 사상자가 늘고 있다.

이스라엘 사상자도 적지 않다. 물론 어느 쪽이 더 많은 사상자를 냈는지 따지는 건 지금 중요한 일이 아니다. 당분간 죽음의 행렬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스라엘이 지상군을 투입해 어느 쪽도 이기기 힘든 수렁에 빠져들기 전 극적으로 화해할 수는 없을까.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마르틴 부버(1878~1951) 전 이스라엘 히브리대 교수가 쓴 ‘나와 너(Ich und du)’를 펼쳐 본다. 저자는 이스라엘 건국을 꿈꿨던 시오니스트였다. 하지만 아랍인을 몰아내고 탄압하는 배타적 시오니즘을 경계했다. 평화 공존의 새로운 공동체를 꿈꿨던 그는 이스라엘 주류 사회에서 배척당했다.

‘나와 너’에서 그는 대화가 지닌 힘을 언급했다. 히틀러와 나치,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인간성 상실 시대를 살며 역설적으로 ‘인간 사이 존재론’을 그렸던 그는 인간관계의 시작인 만남과 이를 잇고 유지하는 대화의 자세를 요청했다. 인간이란 결국 서로 다른 걸 인정할 줄 알아야 하며 너를 나와 같게 만들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도 짚었다.

부버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앙금이 쌓일 걸 예상했던 건 아닐까. 이미 오래전 부버는 대화를 갈등의 해법으로 제시했다. 책장을 덮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세우는 ‘평화 공존의 새로운 공동체’를 잠시나마 상상해 본다.

장창일 종교부 차장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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