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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시선’을 향해… 영화가 끝나면 삶의 토크가 시작된다

상영 후 ‘씨네토크’로 소통하는 서울국제사랑영화제 속으로

이승구(왼쪽) PD와 추상미 감독이 지난달 18일 서울 서대문구 필름포럼에서 열린 제20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SIAFF)에서 영화 ‘파편들의 집’ 상영 후 씨네토크에 참여하고 있다. SIAFF 제공

대한민국 영화사에서 1938년은 의미 있는 해로 기록된다. 그해 11월 서울 중구 태평로1가 부민관에서 무성영화 33편, 발성영화 12편이 상영된 ‘영화 전시회’(현 청룡영화상 전신)가 최초의 영화제로 역사의 획을 그었기 때문이다. 이후 85년여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 영화계는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등 ‘세계적’이란 수식어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다양한 영화 축제를 선보여 왔다.

6일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국내에서 연중 진행되는 영화제는 50여개(개최 횟수 5회 이상 기준)에 달한다. 수치상으로 보자면 연중(52주) 매주 영화제가 열리는 셈이다. 30초 이내의 짧은 영상으로 공감을 끌어내는 영화제, 장애인들에게 영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영화제 등 각 영화제가 보여주는 개성도 다채롭다.

개성이 관객과 만나 색다른 경험으로 발화할수록 영화제가 관객에게 주는 영향력은 확장된다. 최근 폐막한 서울국제사랑영화제(SIAFF)는 이 같은 확장에 새로운 흐름을 보여 준 행사로 평가받고 있다. 그 바탕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찾아간 스크린에는 만남과 대화, 그리고 울타리를 넘어선 깨달음이 필름처럼 영사되고 있었다. SIAFF는 기독교 가치관을 관통하는 ‘아가페’ 사랑을 내세운 영화제다.

영화가 끝나면 시작되는 영화 같은 시간

지난달 18일 오후 8시 30분. 영화제가 진행 중인 서울 서대문구 필름포럼 1상영관엔 영화 ‘파편들의 집’의 엔딩 크레딧이 흐르는 스크린 앞으로 분주하게 사람들이 움직였다. 상영관을 떠나는 관객들의 걸음이 아니었다. 다음 순서인 ‘씨네토크’를 진행하기 위한 스태프들 모습이었다. 무대 앞 조명이 향한 두 개의 의자엔 재난 전문 다큐멘터리 연출가인 이승구 PD와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연출한 추상미 감독이 나란히 앉아 말문을 열었다.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첨가하지 않은 유기농 통밀빵 같은 작품이었어요. 첫 장면부터 기억이 납니다. 전쟁터에서 불과 20분 남짓 떨어진 곳의 쉼터인데도 보육원 교사가 각 아이의 성향에 따라 익숙하게 아침을 깨우더군요. 피리를 불어주기도 하고 물을 튀기기도, 애칭을 부르기도 하고요.”(이 PD)

“최근 자립준비 청년 관련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드라마 극본을 집필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육원에서 보내고 있어요. 버려짐의 상처에 대한 깊은 골을 발견하는 과정이자 아픔을 깊이 공감하기 위해 기도하며 낮아지는 과정입니다. 이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메시지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네요.”(추 감독)

현장을 채운 건 두 사람의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객석 곳곳에서 작품에 대한 자신만의 고찰과 함께 나누고 싶은 주제들이 화수분처럼 터져나왔다. 한 관객은 상담 전문가로 살아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언급하며 영화 속 보육원 아이들처럼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방안과 다큐멘터리 영화의 역할을 대화 주제로 꺼내놨다.

이후에도 등장인물의 시선과 심리 상태를 오롯이 담아내기 위한 촬영 기법, 우리 사회에 현존하는 갈등과 아픔, 일상에 대한 성찰, 지향해나가야 할 희망 이야기가 씨실과 날실처럼 엮였다. 상영시간 86분짜리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은 100분을 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서야 영화관을 나섰다. 올해 20회를 맞은 SIAFF의 개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문화적 관점으로 조명하는 기독교의 일상
지난달 15일 서울국제사랑영화제 현장에서 영화 ‘시몬 김성수 : 우리는 최고다’의 씨네토크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 SIAFF 제공

15편의 작품이 엿새에 걸쳐 관객들을 만난 이번 SIAFF엔 모든 영화마다 ‘씨네토크’가 준비됐다. 현장을 찾은 관객들이 단순히 작품 관람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보고 대화할 수 있도록 마련한 장치다. 영화제 부집행위원장 성현 필름포럼 대표는 “지난해보다 작품 수는 줄이고 작품 간 시차는 늘렸다”며 “통상 30~40분 정도 진행하던 ‘씨네토크’에 더 집중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영화는 드라마, 음악과 함께 가장 대중적이고 일상화된 문화 콘텐츠로 꼽힌다. 동시에 사회·문화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작품에 담긴 세계관과 메시지가 공유와 확산을 거듭하며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기도 하고 의미 있는 변화의 물꼬를 트기도 한다.

성 대표는 “기독교 신앙이 일상 안에서 어떻게 펼쳐질 수 있는가를 문화적 관점으로 조명하고 소통해나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영화제를 얼마나 귀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지 느낀다”고 전했다. 이어 “크리스천이라면 마땅히 고찰해야 할 이슈임에도 강단에서 메시지로 전달받기는 어려운 것이 교회의 현실”이라며 “영화는 이 같은 경직성을 해소하고 자연스럽게 대화의 장을 열기 좋은 도구”라고 덧붙였다.

소그룹에서 영화를 말해보자
영화 ‘시몬 김성수 : 우리는 최고다’의 씨네토크 참가자와 관람객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SIAFF 제공

독립영화관에서 대중성과 한 걸음 물러난 작품을 감상하고 소통하는 일은 대형 백화점에서 간편하게 기성복을 골라 구매하는 방식이 아닌 전문 양복점에서 맞춤복을 맞춰 입고 나오는 것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SIAFF의 지향점은 엔데믹 시대에 다시 떠오르는 소통에 대한 바람과 맞닿아 있다.

이날 두 번째 씨네토크를 경험했다는 엄지은(31)씨는 “문화예술 분야의 전문가들뿐 아니라 같은 작품을 감상한 관객들과도 소통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특별한 경험”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꼭 영화제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주변 지인들과 다양한 콘텐츠를 도구로 일상에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성 대표는 “교회 내 부서별로 함께 영화를 관람한 뒤 대화를 나누거나 온라인을 통해 같은 영화를 감상하고 소그룹 모임에서 기독교적 시각과 생각을 공유해본다면 강단에서의 설교, 통상적인 QT(말씀묵상)와는 차별화된 교제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SIAFF 상영작인 ‘커밍 홈 어게인’은 필름포럼에서 현재 상영 중이며 다른 작품들도 올해 하반기와 내년 상반기 중 개봉할 예정이다. 지난해 개봉작인 ‘매스’는 VOD 서비스를 통해 만날 수 있다.

SIAFF의 슬로건은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시선’이다. 집행위원장 배혜화 전주대 명예교수는 “아무리 음침한 골짜기 같은 분위기의 영화라 할지라도 하나님 없는 세상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확인하는 기회로 쓰임 받을 수 있다”며 “복음이 경계를 뛰어넘어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에게 전달되고 소통이 확산될 때 생명력 있는 문화가 사회에 자리 잡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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