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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누구도 내주지 않은 숙제

전재우 사회2부 선임기자


어릴 적 추석은 늘 심심했다. 찾아갈 고향도, 찾아오는 친척도 없는 명절. 1972년 경기도 파주 문산읍에 임진각이 개관한 이후 차례를 마치면 아침을 먹고 늘 임진각에 갔다. 긴 줄을 기다려 망배단에서 참배한 후 자유의 다리가 보이는 철조망 앞에 잠시 있다가 임진각 옥상에 올라가 북녘 하늘을 바라보고 돌아왔다. 연휴 일정은 그게 다였다. 임진각 개관 10여년 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래도 추석날 일정은 항상 같았다. 92년 파주 탄현면에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생긴 이후에는 임진각을 가지 않았다. 오두산 전망대가 가기 더 편하고 북한 땅도 보여서였다. 이번 추석 다음 날 오두산 전망대에 갔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추석 당일이 아니어서인지 한산했다. 실향민으로 보이는 어르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전망대 광장 망배단은 텅 비어 있었다. 전시실을 지나 야외전망대로 나갔다. 날이 좋아 임진강 건너의 선전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슴푸레 개성 송악산도 보였다. ‘송악산에서 100㎞ 정도 더 가면 아버지 고향일 텐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추석이 다가오면 그리움이나 슬픔 등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먹먹함이 항상 마음 한켠을 짓누른다. 차례를 지내던 아버지의 표정이나 임진각에서 이북을 바라보는 눈빛이 기억나서만은 아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조부모의 묘소라도 찾아봐야 한다는, 누구도 내준 적 없는 숙제 때문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숙제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시기도 있었다. 98년 11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다. 85년 남북 고향방문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갔던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2000년 8월 15일에는 제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그 후로 해마다 한두 차례씩 이산가족 상봉은 이어졌다.

2003년 9월부터는 금강산으로 가는 육로가 뚫렸다. 그때쯤 금강산에 갈 기회가 생겼다. 관광 구역 안에서는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지나가는 북한 주민들을 만나기도 했다. 외금강과 삼일포로 가는 셔틀버스는 인근 마을 안을 지나는 길로 다녀서 주민들이 실제 사는 집 내부도 엿볼 수 있었다. 2007년 12월에는 개성관광이 시작됐다. 조금 더 기다리면 평양 관광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평양에 가면 어떻게든 아버지 고향을 찾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10년간 진행됐던 북한 관광은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살로 중단됐다. 그때까지 16차에 걸친 이산가족 상봉과 7차에 걸친 화상 상봉이 이뤄지고 있었다. 남북 관계는 경색됐다. 그러나 이산가족 상봉은 2009, 2010, 2014, 2015, 2018년에도 이어졌다. 제1, 2공화국 시기에는 전쟁 직후라 남북 교류 자체를 입에 올리지도 못했겠지만 제3공화국부터 정부 차원의 교류가 시작됐다. 남북 고향방문단은 제5공화국 때 진행됐다. 배경이야 어떻든 이승만정부를 제외한 모든 정부가 평화를 위해, 실향민을 위해 북한과 교류를 이어왔다.

지금 남북 상황은 암담하다. 양 체제에 대한 평가는 진작 끝났는데 다시 체제 수호 얘기가 나오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북한 조선중앙TV는 지난달 30일 열린 항저우아시안게임 여자축구 8강전 한국과 북한의 경기에서 우리나라를 ‘괴뢰’로 표기해 중계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이후 들은 적도 쓴 적도 없는 단어가 다시 나왔다.

아버지가 자주 부르던 노래 중 하나는 ‘꿈에 본 내 고향’이다. 70년도 훨씬 지나 그곳에 아무 흔적도 없다는 걸 알지만 나라도 대신 가봤으면 좋겠다. 내 힘으로 숙제를 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희망만은 짓밟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전재우 사회2부 선임기자 jw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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