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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미국 정치의 정체성 혼란

신창호 국제부 선임기자


민주당과 공화당이 경쟁해온 미국 정치는 백년 이상 세계 각국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4년마다 열리는 대통령선거, 2년마다 절반씩 교체되는 상·하원 선거의 판도는 민주주의 정체를 채택한 서방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 제3세계 국가의 운명까지 바꿀 정도로 엄청난 파급력을 갖는다.

1960년대 미국 민주당이 주도한 민권·남녀평등·반전평화운동 등은 전 세계 진보 세력의 핵심 가치를 바꿔놓았다. 60·70·80년대 평등한 소득 분배에만 매달렸던 사회주의 물결이 소련의 공산주의 관료 시스템에 질식당하자, 진보 진영은 권리의 평등과 사상의 자유 확장에 사활을 걸었다.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은 진보의 전성시대가 됐다. 토니 블레어가 집권했던 당시의 영국,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독일, 프랑수아 미테랑의 프랑스가 그랬다.

진보의 가장 큰 무기는 서구 국가들의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언론·결사의 자유’였다. 이들이 다양한 형태로 명문화된 법과 각종 사회 제도가 담아내지 못하는 불평등, 모순을 끄집어내 대중은 열광했다. 절차적·제도적 민주주의의 영역을 이른바 ‘사회적 민주주의’로 확장한 셈이다. 사회적 민주주의는 다소 위법적 방법이 동원된다 해도 정당한 목적을 가진 활동은 사회적으로 용인된다는 것이다.

이전 시대까지 철저하게 금기시됐던 다양한 진보적 이슈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민주사회의 제도로 보장되기 시작했다. 양성평등, 동성 결혼 합법화, 환경주의, 동물보호 등은 진보 진영이 이뤄낸 성과들이다. 그런데 2016년 공화당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사회적 민주주의는 더 이상 진보 진영의 독점물이 아니게 됐다.

트럼프는 미국 주류사회에서 소외된 저학력·저임금 백인 노동자 계층과 시골 촌부들을 주 지지층으로 삼았다. 이들에게 “당신들이 잘살고 많이 배운 상위층에 철저히 배제된 동안 미국은 갈수록 이상한 나라가 돼 간다”고 주장했다. 소수의 백인 진보 엘리트들과 유색인종, 지식인들이 결합된 과두체제가 다수의 하위층 백인을 지배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광범위하게 퍼뜨렸다.

2020년 대선에서 진 트럼프의 지지자들이 의회를 습격한 사건은 극우 포퓰리즘 성향의 트럼피즘을 대표하는 사건이다. 뉴욕타임스는 이틀 전 “대선을 1년 앞둔 지금의 정치지형은 우파(공화당)가 사회적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좌파(민주당)가 법과 질서, 절차적 민주주의에 천착하는 형국”이라는 칼럼을 게재했다. 진보가 사회적 민주주의를 무기 삼아 보수와 맞섰던 60년대 미국과 정반대 현상, 그러니까 정체성 혼란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트럼프가 온갖 추문과 위법으로 여러 개의 법원에 기소됐음에도 공화당원들은 “죄 없는 트럼프를 옥죄기 위해 ‘가짜 죄목’을 씌우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라성 같은 당내 경선 후보들이 나와도 이들의 트럼프 지지는 철옹성처럼 굳건하기만 하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진정한 미국의 여론은 우리 같은 하층 서민 백인들의 생각”이라고 내세운다. 법과 제도가 보장하고 있는 각종 권리에 대해서도 “인류의 도리에 어긋난다”거나 “엘리트들이 자기들끼리 협잡해 만든 것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곡해하는 제도 언론 대신 ‘대안 언론’을 만들어 트럼피즘은 물론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 편견까지 실어나른다. 이들에게 민주주의 근간인 사회적 정의와 절차적 정당성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이슈든 우리의 정서에 맞으면 옳고, 맞지 않으면 틀리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흔히 봐오던 포퓰리즘의 새로운 형태인 셈이다.

신창호 국제부 선임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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