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원의 메디컬 인사이드] 마약 수단 된 전자담배


얼마 전 서울 대치동 학원생들을 노린 ‘마약 음료’ 사건은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기억력과 집중력을 강화해준다며 건네진 음료통에 마약 성분이 들었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몇몇 아이들이 그런 줄도 모르고 무심코 마셨다가 피해를 봤다. 마약이 일상 곳곳에 파고들었다지만 선량한 아이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음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마약 자체가 아닌, 청소년이 좋아하는 식품이나 기호품에 섞여 유통된다면 자신도 모르게 마약에 중독되는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 기호품으로 치부되는 전자담배다. 특히 니코틴액을 기기 장치에 넣어 피우는 액상 전자담배가 최근 마약의 신종 수단이 되고 있다. 액상 전자담배는 청소년 사이에 ‘베이핑(vaping)’으로 통하며 사용이 늘고 있는 추세다. 시계 에어팟 게임기 등 세련된 디자인과 색상을 갖춘 기기 장치와 맛·향이 다양해진 액상이 청소년을 유혹하기 십상이다. 이 기기 장치에 니코틴액과 액상 대마 혹은 ‘좀비 마약’으로 불리는 펜타닐을 섞어서 담배라고 속여 흡입하게 하는 일이 실제 일어나고 있다. 이런 유형의 마약 사건이 부쩍 많아졌다. 연루자 가운데 10대도 꽤 등장한다.

액상 전자담배는 현행법상 담배가 아닌 ‘유사 담배’로 취급돼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는다. 기기 장치는 공산품으로 인터넷에서 싸게 구입할 수 있다. 액상 전자담배를 이용한다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숨기거나 던지기 수법을 쓰지 않고도 공공연하게 마약을 퍼뜨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마약의 고삐가 한순간에 풀릴 수 있다. 한 금연 전문가는 마약의 루트가 된 액상 전자담배를 “매일 러시안 룰렛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총알이 장전돼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계속 죽음의 방아쇠를 당기듯이, 기기 장치에 뭐가 들어 있는지 깜깜이 상태로 마약범죄에 빠지거나 중독자가 될 수 있어서다.

액상 전자담배를 통한 마약 유통 문제를 반면교사로 삼을 나라가 있다. ‘펜타닐 유행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마약 중독자가 많은 미국이다. 2019년 미국에선 액상 전자담배에 액상 대마를 섞어 사용한 청소년과 20대 가운데 ‘급성호흡곤란증(EVALI)’으로 수십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천명이 입원한 바 있다. 미국 정부는 부랴부랴 액상 전자담배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할 대책 마련에 나섰다. 교직원을 대상으로 액상 전자담배 기기 구별 교육을 하고 학교 내 감시·감독을 위한 직원을 배치했다. 마약이 든 액상 전자담배를 피우다 발생하는 응급상황 대처 매뉴얼도 만들었다.

한국도 최근 마약범죄가 증가하자 범부처 대책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불법 마약 유통 단속과 처벌에 집중돼 있고 새로운 마약 수단의 규제는 간과하고 있다. 정부가 시각을 넓힐 필요가 있다. 한때 자살 수단으로 지목됐던 농약 그라목손을 사용 금지시켰더니 자살률이 크게 감소했다는 점을 상기하자. 규제 사각지대의 액상 전자담배로 인한 마약 유통이 아직은 큰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서둘러 손을 쓰지 않으면 5~10년 내 사회문제로 등장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전 세계가 마약과 관련해 주목하는 곳이 있다. 펜타닐에 빠져 좀비처럼 걸어다니는 마약 중독자들이 즐비한 미국 필라델피아 북동부 켄싱턴 거리다. 우리나라의 한 도시, 한 거리에서 현실화되지 말란 법이 없다.

마약 수단이 된 액상 전자담배를 담배에 포함해 서둘러 규제하고 십수년째 논의만 되고 있는 담배 성분 공개 법안도 통과돼야 한다. 보건·교육 당국은 청소년 흡연 예방교육에 전자담배를 통한 마약 노출의 위험성을 포함해야 한다. 교사·학부모 교육도 중요하다. 아울러 정기 청소년건강행태 조사 시 마약 사용 실태 파악이 필요하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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