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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 성소피아성당과 모스크 사이

장창일 종교부 차장


지난주 튀르키예 출장을 다녀왔다. 올 2월 발생한 대지진 이후 구호 진행 상황을 모니터링하는 한 국제구호단체와 동행했다. 1차 진앙인 남부 가지안테프는 물론이고 여기에서 수백㎞ 떨어진 여러 도시에서도 적지 않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지금도 임시 거주시설인 컨테이너촌이 새롭게 생기고 있었고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이 도움의 손길을 잇고 있다.

규모 7.8의 대지진은 평범했던 일상을 앗아갔다. 5개월이 지난 뒤였지만 복구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지진이 할퀸 상흔은 깊고 넓었다. 나흘 동안 승합차로 1000㎞ 가까운 거리를 이동하며 구호 현장을 취재한 뒤 귀국을 위해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출국 전 시간을 내 성소피아성당을 찾았다. 박물관으로 사용되다 2020년 갑자기 모스크로 바뀐 성당이 어떤 모습일지 확인하고 싶었다.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500m는 돼 보이는 구불구불한 대기 줄 끝에 섰다.

현재 남아 있는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537년 완공한 세 번째 건물이다. 당시 축성식에서 황제는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을 능가했다는 의미로 “솔로몬이여, 내 그대를 이겼노라”고 했다고 한다. 6세기 비잔틴 건축물 중 최고로 꼽히는 성당은 거대한 돔을 받치는 기둥이 없을 정도로 건축학적으로도 뛰어나다. 긴 세월 그리스정교회의 본산이던 성당은 1453년 오스만튀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 500년 가까이 모스크로 사용됐다.

1934년이 돼서야 성소피아 특별법에 따라 박물관으로 지정됐고 이듬해 인류의 품에 안겼다. 다시 모스크가 되는 데는 86년이 걸렸다. 2020년 7월 24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성소피아성당에서 코란을 암송하면서 모스크가 된 걸 기념했다.

곡절이 많았던 성당이 모스크가 된 뒤에는 지켜야 할 규칙이 많아졌다. 우선 신발을 벗어야 하고 하루 다섯 차례 드리는 예배 시간이 되면 무슬림이 아닌 관광객은 어김없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고색창연했던 비잔틴 모자이크도 볼 수 없게 됐고 조용했던 분위기도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예배 시간에 밀려 성당 밖으로 나오면서 문득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교회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맴돌았다. 신앙인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웅장한 건물이 교회를 대변하는 건 분명 아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은 1853년부터 3년 동안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영국·프랑스 연합군이 크림반도와 흑해를 둘러싸고 벌인 크림전쟁 중 오스만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현 이스탄불)에서 간호사로 활약했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그를 ‘백의의 천사’라고 부르지만 세계적으로는 ‘등불을 든 여인’이라는 별칭이 더 유명하다. 한 언론의 크림전쟁 르포에서 이 별칭이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한 치의 과장도 없이 섬기는 천사였다. 그녀의 가녀린 모습이 지날 때마다 모든 이들의 얼굴이 감사의 마음으로 누그러졌다. 모든 의료진과 군의관이 처소로 돌아가 적막함과 어둠이 병자들 위에 내려앉으면 ‘작은 등불을 들고’ 홀로 병동을 도는 그녀를 볼 수 있다.”

성경은 등불을 복음에 비유한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눅 8:16)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뒤 성소피아성당을 돌아봤다. 그 성당이 박물관이 됐든, 모스크가 됐든 중요한 건 성당이 그 자리에 서 있는 이유다.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라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답게 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웅장한 건물 안에서 드리는 예배만이 복음의 길은 아니라는 걸 모스크가 된 성소피아성당 앞에서 생각해 본다.

장창일 종교부 차장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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