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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 극한호우

태원준 논설위원


비처럼 다양한 이름을 가진 기상현상도 없을 것이다. 봄비 장맛비 가을비 겨울비 하면서 계절마다 이름이 바뀌고, 산성비 흙비 황사비 등 빗물의 성분에 따라 달리 불리며, 단비(가뭄 끝에 내려서) 잠비(여름에 비가 오면 농사일을 쉬고 낮잠을 자니까) 떡비(수확철인 가을에 비가 오면 역시 일을 쉬고 떡을 해먹곤 해서)처럼 비에 대한 감정이나 비로 인한 행태가 이름에 담기기도 한다.

이런 작명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역시 비의 양인데, 예부터 빗방울이 흩날리면 이슬비·가랑비, 땅을 적실 정도면 보슬비·부슬비, 굵은 빗줄기가 잠시 쏟아지면 소나기, 세차게 계속되면 장대비라고 했다. 자동차 와이퍼의 시야 확보 기능은 시간당 강수량 40㎜ 정도가 한계라고 한다. 그보다 많이 퍼부으면 와이퍼를 최고 속도로 켜도 운전하기 어려운데, 요즘 그런 비가 잦아지면서 ‘폭포비’란 표현이 등장했다. 아직 사전에 오르진 않았지만, 폭포처럼 쏟아지는 비를 뜻한다.

기상청은 3시간에 60㎜(또는 12시간에 110㎜)가 넘는 강수량이 예상되면 호우주의보를, 90㎜(또는 180㎜) 이상이면 호우경보를 발령해왔다. 이런 비는 폭우라 불렸고, 기준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기준량을 넘어설 때가 많아 집중호우라고도 했다. 국내 집중호우 사상 1시간 최다 강수량은 1988년 지리산 폭우 사태 당시 145㎜가 쏟아진 전남 순천에서 기록됐다(세계 기록은 1975년 중국 상하이 401㎜). 이렇게 많은 비가 좁은 지역에 집중되는 일이 갈수록 빈번해져 국지성 호우란 말이 나왔고, 예상치 못한 곳에 갑자기 퍼붓곤 해서 게릴라 호우란 말이 또 나왔다.

그제 서울 구로·동작·영등포구의 7개 동에 ‘극한호우’ 재난문자가 발송됐다. 처음 사용된 이 이름은 1시간에 50㎜(또는 3시간에 90㎜)가 넘는 비를 가리킨다. 자동차 와이퍼가 무용지물이었다는 뜻이다. 기후변화는 비에 대한 새로운 작명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 이미 ‘극한’이란 표현까지 써버렸는데, 이보다 더한 비가 등장하면 그땐 뭐라고 이름을 지어야 하나….

태원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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